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20년대 중반 포항청년회(浦項靑年會) 등 영일지역 청년운동과 사회운동 조직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4월경부터 고려공산청년회 포항야체이카 간부였던 정학선(鄭學先)의 지도로 ‘사월회(四月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사회과학을 학습하면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결성과 함께 조직된 고려공산청년회는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총 지도기관으로서, 민족혁명적인 청년들을 조직화하여 민족혁명과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1926년 11월 하순경 포항의 자택에서 이상갑(李尙甲)·이말인(李末寅)·원호이(元浩伊)와 함께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동시에 정학선의 지도를 받으면서 포항야체이카를 조직하고, 1927년 8월 상순경 조직이 해체될 때까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7년 7월 22일 영일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 포항지회 설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8월 영일군 포항면(浦項面)의 시모무라(下村) 면장(面長)이 한국인을 무시하자 이에 대항하여 면민대회(面民大會)를 개최하고 면장 배척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8월 14일 면민대회 개최를 앞두고 신간회 포항지회와 포항청년회에서 성명서 인쇄 등 제반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포항경찰서(浦項警察署)에서 대회 금지를 명하였다. 이때 면 당국과 군 당국에 교섭하는 신간회 및 청년회 측의 질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8월 12일 영일군 내 각지에 산재한 청년단체를 망라하여 군(郡) 단위의 단일동맹으로 영일청년동맹이 창립될 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0년 8월 영일청년동맹 포항지부 정기총회 준비위원, 선전교양부 담당 상무위원 등에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20일에는 영일청년동맹 서기 및 조직연락 담당 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 사이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포항지국,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 포항지국에서 기자로 근무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30년 9월 19일 가택수색(家宅搜索)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이른바 ‘포항공산당(浦項共産黨) 사건’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상갑·이종철(李鍾哲)·김화섭(金和攝)·이재우(李載雨) 등 신간회 포항지회 및 영일청년동맹 간부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11월 5일 검찰로 송치되어, 1931년 6월 27일 예심(豫審)이 종결되었다. 8월 5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8월 6일에 풀려났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법원:1931. 8. 5)
- 형사사건부(刑事事件簿)(대구지방법원 검사국, 1930. 12)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중외일보(中外日報)(1927. 3. 30, 7. 27, 8. 18, 1930. 5. 18, 8. 16, 8. 18, 8. 22, 8. 24, 9. 16, 9. 21, 1932. 4. 13, 4. 22)
- 동아일보(東亞日報)(1926. 5. 11, 1928. 3. 27, 8. 16, 1930. 10. 18, 11. 9, 1931. 4. 15, 7. 31, 8. 10)
- 매일신보(每日申報)(1930. 11. 9, 1931. 7. 31, 8. 7)
- 일제침략과 민족운동기의 포항(5)(배용일, 포항연구 제5호, 1990) 140, 14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