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고종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김상준(金相峻)과 윤규현(尹圭鉉)이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견문하고 산청군 신등면(新等面) 평지리(坪地里)로 귀향하며 「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김상준은 부친 김영숙(金永淑)에게 독립선언과 독립만세 상황을 전하고 김기갑(金基甲), 윤치현(尹致鉉) 등의 동지들을 규합했다. 1919년 3월 18일 밤 각 마을에 ‘3월 19일 아침에 단계리(丹溪里) 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친다’고 통지했다.
하지만 시위 출발 무렵에 헌병들에게 김상준 등이 체포되고 100여명의 주민들이 저항했으나 약 20명이 단성(丹城)으로 압송됐다. 한편 김영숙도 김상호(金相浩), 정태륜(鄭泰侖) 등과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정태륜은 「통고문(通告文)」, 「조선독립선언서」 격문 2종과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 깃발을 3월 18일 밤 신등면, 도산면(都山面) 내의 주요 지점에 부착했다. 3월 20일 오후 2시 단계리시장에 500여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이들은 주재소 헌병의 저지에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읍내를 행진했다.
3월 21일 단성시장 장날에 헌병 오장 이하 8명과 80연대 보병 상등병 이하 3명은 아침부터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의 통로에 경계선을 설치하고 성내리 주민들에게 ‘주의(注意)’를 명령했다. 오후 1시경 단성시장에 약 800여 명의 군중들이 집결했다. 이때 단성면 소남리(召南里)의 하성백(河聖伯)은 사월리(沙月里)의 이철주(李鐵柱)·주쇠이(朱釗伊)·남사리(南沙里)의 김선명(金善明)·김천식(金千錫)·박권세(朴權世)·이춘도(李春道)·성내리의 최보림(崔普林)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3시경 이호용(李好用) 등 5~6명이 경비선을 넘어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으나 헌병은 해산을 강요하며 협상을 거부했다. 30여 분이 지날 무렵 남사리 방면에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로 진출했다. 이어 헌병의 총을 파손하고 돌과 몽둥이로 헌병에게 부상을 입히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주재소 문 앞까지 온 군중들을 향해 일본 군경이 일제히 발포하여 11명이 순국하며 50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다수가 체포되었다.
하성백은 이러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단성헌병주재소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되어 1919년 8월 9일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한 옥고를 겪고 1920년 8월 9일 출감했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19. 5. 31)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19. 9. 17)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7. 17)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10. 18)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3보, 1919. 3. 22)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조선소요사건의 사상수 건 보고, 1919. 9. 29)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관한 건, 1919. 10. 2)
- 대정8년(大正八年) 소요사건(騷擾事件)에 관(關)한 도장관보고철(道長官報告綴) 7책(冊)의 내(內)(2)(경상남도장관, 전보, 1919. 3. 22)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313~3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