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병구는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남북 만주, 상해, 간도 등지를 다니며 동지 규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병구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북간도 왕청현(汪淸縣)에 본부를 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하여 항일 활동을 펼쳤다.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 군사기관이었던 북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함께 초기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주도한 독립군단이었다. 1920년 10월에는 한국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사상 가장 빛나는 대첩으로 일컬어지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수많은 국내진입전을 통해 일제의 침략기관 및 수괴들을 처단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임시정부의 산하기관이었기에 임정 수립 초부터 많은 왕래를 가졌다. 따라서 그러한 구조 속에서 김병구도 임정이 운영한 독립신문사의 지방특파원에 임명되었고, 그 직책과 겸해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이 되어 북간도에서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사 특파원인 김병구는 항시 몸속에 독립신문과 경고문을 휴대하고 다니며 활동하였다. 청산리대첩 후 북간도에 근거지를 두었던 독립군단들이 북만주로 이동하면서 소속 독립군들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하지만 김병구는 북로군정서가 있었던 북간도지역에 계속 남아 독립군단 재건을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1923년 1월 10일에는 화룡현(和龍縣) 명신사(明新社)에서, 1924년 1월 12일부터 18일까지는 연길현(延吉縣) 수신사(守信社)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모금 활동을 벌일 때마다 김병구는 친일재산가들에게 애국심을 각성시키기 위해 독립신문과 경고문을 펼쳐 읽게 하였다. 그러나 김병구의 이 같은 활동은 결국 일제의 감시망에 포착되어 1924년 2월 체포되어 1925년 1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등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11년여의 옥고를 겪고 1935년 1월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在上海 獨立新聞社 地方特派員 金炳九가 陳述한 同 新聞經營의 內容 및 不逞團의 行動 等에 關 한 件(1924. 3. 6) 不逞團關係雜件 - 朝鮮人의 部 - 上海假政府(5)
- 東亞日報(1924. 11. 16)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5. 1. 21)
- 假出獄執行濟之件報告(平壤刑務所:1935. 1. 24)
- 朝鮮日報(1924. 10. 12, 1925. 1. 16·1. 22)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0집 788~79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