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30년 가을경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읍에서 김학주(金鶴柱)의 소개로 용산독서회(龍山讀書會)와 삼천포농민조합(三千浦農民組合)에서 활동했다. 삼천포읍 이금리(梨琴里)의 용산야학회(龍山夜學會)에서 조직한 용산독서회는 삼천포읍 이홀리(耳笏里)의 농촌청년들이 1929년 9월에 조직한 것으로 사회과학 등을 연구했다. 일본 경찰은 삼천포공립보통학교(三千浦公立普通學校)의 맹휴(盟休)를 계기로 관련자 집을 수색했으며, 이 과정에서 ‘용산독서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출옥 후에도 용산야학회의 교사 등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2년 3월 9일 일본 경찰은 도(道) 당국의 인가 없이 교육을 했다는 구실로 용산야학회의 폐쇄를 명하였는데, 이때 동료 교사인 최을환(崔乙煥)·김성규(金誠圭)와 함께 한때 검속되었다.
이후 용산독서회 위원장이었던 정종주(鄭琮柱) 등과 함께 삼천포 지역을 중심으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고자 동지 규합에 나섰다. 1934년 4월경 정종주에게 손영섭(孫泳燮)을 소개하였다. 이들은 농촌야학을 개설하여 무산농민의 자제(子弟)들을 교육하여 그 가운데서 전위적인 운동가를 양성하기로 했다. 같은 해 말부터 1935년 초 사이에 야학 개설을 위한 적임자로 문갑이(文甲伊)를 소개하여 이후 그를 중심으로 야학을 운영하기로 했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38년 3월 3일 ‘삼천포적색농민조합(三千浦赤色農民組合)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 1월 초부터 시작된 이 사건으로 무려 15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9년 5월 4일에 예심(豫審)이 종결되어 10여 명과 함께 공판에 회부되었다. 8월 30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진주지청(晋州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당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32. 3. 14, 1939. 5. 9, 8. 26, 9. 3)
- 판결문(대구복심법원:1932.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