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해산 이후 노령 (露領) 포조 (浦潮) 에서 의병을 일으켜 함북 (咸北)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연추 (煙秋) 에서 의병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3․1운동 직후 의병을 이끌고 양재구 (養才溝) 에서 활동하였고 1919년 4월 대한국민 노인동맹단 (大韓國民老人同盟團) 의 단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3년 이범윤 (李範允) ․김좌진 (金佐鎭) 등과 함께 임시정부 (臨時政府) 를 유지해야한다는 내용의 「재만 유지의 경고서」를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합이빈 (哈爾賓) 일본총영사로부터 3년 간 재류금지 처분 (在留禁止處分) 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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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본적은 함경북도(咸鏡北道) 길주군(吉州郡) 장백면(長白面) 양포리(兩浦里)이며, 독립운동 당시의 주소는 길림성(吉林省) 동녕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이었다. 최세진은 구한말(舊韓末)에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군대해산과 동시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범윤(李範允)·김영준(金榮璿) 등과 상의하여 의병 500명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창태곡(倉太谷) 등에서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얀치헤에서 의병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의병을 이끌고 양재구(養才溝)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의 단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단(同團)은 독립운동자금의 모집과 일본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의 독립청원서 제출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사이토(齋藤實) 총독 처단을 기도했던 강우규(姜宇奎)도 노인동맹단의 단원이었다.
1923년 이범윤·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유지해야한다는 내용의 「재만 유지의 경고서」를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하얼빈(哈爾賓) 일본총영사로부터 3년 간 재류금지(在留禁止)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0집 373면
- 新韓民報(1923. 6. 28)
- 鮮人의 行動에 관한 건(1919. 10. 1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8)
- 鮮人의 行動에 관한 건(1919. 5. 2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11)
- 在留禁止者처분에 관한 건(1923. 11. 10) 外務省기록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