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서울 중동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0년 7월 초순경 같은 하숙집의 문화학원 학생인 손용우(孫龍祐)에게 여러 차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했다. 손용우는 이완기의 권유로 이광수(李光洙)의 『무정(無情)』 등을 읽고 점차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이완기는 손용우에게 중일전쟁 이후 일본 당국이 학교 내에서 일본어(日本語) 사용, 군사교련,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제창 등을 강요하고 한국인의 입학난이 심해지는 것 등은 모두 일제의 강제병합 때문이라면서, 이런 상태에서는 한국인의 복리 증진은 바랄 수 없으므로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조선정신을 견지하여 스스로 이를 엄수하여 청년 학생을 지도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조선인은 조선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재학 중에는 학우를 지도하고 졸업 후는 농촌청년을 지도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우리 민족의 행복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를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또 7월 중순경에는 손용우에게 “당면한 유럽의 세계대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 독일이 유럽을 통일하면 동양으로 진출해 일본과 충돌할 것이며, 일본이 패전할 때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해야만 하고 중일전쟁에 의해 일본의 경제가 피폐해 있으므로 독일에 저항할 수 없어 패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 기회에 조선의 독립운동을 결행한다면 용이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므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는 내용을 교양하였다.
한편 이완기는 서보식(徐輔植) 등과 함께 자신이 다니던 중동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교실에서 쉬는 시간에 학생들에게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 독립을 실현시켜야 한다”, “사립학교 생도는 모름지기 조선혼(朝鮮魂)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 등으로 얘기했다. 또한 군사교련 또는 근로동원을 나가면 서보식·문봉성(文鳳成)·노영철(盧永哲) 등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학생 군사교련이나 지원병(志願兵) 제도 반대 등을 주창했으며, 만약 지원병으로 가더라도 절대 “조선혼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완기로부터 큰 감화를 받은 손용우 등 문화학원 학생들은 1940년 10월 1일 이른바 일제의 시정기념일(施政記念日)을 기하여 서울 사직공원(社稷公園) 입구에 세워져있는 경성부(京城府)의 국세조사(國勢調査) 광고판에 ‘대한독립만세’라는 낙서를 하는 등 선전활동을 주도하여 일본 경찰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이 낙서가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에 발각되면서 문화학원 학생을 비롯해 전면적인 검거가 계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완기도 체포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1심 재판을 받고 공소를 제기한 상태에서, 오랜 고문과 취조로 인해 1942년 5월 23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42. 5. 31)
- 사상(思想)에 관한 정보(情報)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