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23년 재만 독립군단인 통의부(統義府)에 가입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2년 8월 남만주의 통합군단이었던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확대 발전시켜 성립된 통의부는 이주 한인을 위한 자치활동과 항일투쟁을 노선으로 한 단체였다. 따라서 대한통의부는 한인사회를 관할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조직을 갖추었고, 의용군을 조직해 일제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같은 통의부의 제2소대 삼등병(三等兵)에 임명된 오흥준은 소대장 송선호(宋善鎬)의 지휘 하에 대원 5명과 함께 평북 위원군에 진입하여 다수의 밀정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런데 통의부의 간부 채찬(蔡燦)·박응백(朴應伯) 등은 1923년 말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방문해 임정의 요인들과 통의부의 일부를 분리시켜 임정 직속의 군부대를 설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남만주로 돌아 온 뒤 1924년 초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를 분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성립시켰다.
따라서 오흥준도 이들과 함께 참의부의 대원이 되었다. 참의부 1중대 참사(參士)에 임명된 오흥준은 1924년 5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또 다시 위원군으로 진입하여 밀정 1명을 처단하고, 위원군 곳곳을 다니며 일경찰대와 수차의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1924, 5년경에는 참의부의 관할지역인 집안현 내 한인 촌락을 다니며 의무금을 징수하는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1928년 10월 하순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 진입을 시도하던 오흥준은 집안현(輯安縣) 유수림자(楡樹林子)에서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일제측에 넘겨졌다. 그는 평북 강계군으로 압송되어 1929년 7월 19일 소위 치안유지법·주거침입 및 강도살인으로 징역 15년을 받아 10년 7개월의 옥고를 겪고, 1939년 5월 28일 가석방되어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參議府 제1중대 參士 吳興俊 등에 관한 抄件(독립기념관)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제5권 263면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獨立新聞(1925. 5. 5)
- 東亞日報(1928.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