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고규영은 전라북도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하였다. 일제가 1930년대 들어 탄압을 가중시키며 민족적·계급적 모순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대중운동이 고양되어 갔다. 전라북도에서도 전주공립보통학교와 전주사립신흥학교, 이리공립농림학교 등을 중심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였다. 전북 지역의 독서회는 한종식(韓鍾植)과 김철주(金鐵柱)가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학교의 독서회 활동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신사상 운동에 머물지 않고 사회운동으로 진전되어, 1931년 전주청년동맹원들은 청년 동지 규합과 사회주의사상 선전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 시기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고규영은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김병윤(金炳倫)과 함께 1932년 5월 말 옥구의 일본인 농장인 웅본농장(雄本農場)의 소작인들이 예전부터 소작인들에게 불리한 정조삽앙(正條揷秧)을 강제당하고 있는데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농민조합을 조직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웅본농장은 옥구군 대야면과 정읍군 태인면에 주사무소를 두고 완주·정읍·부안·옥구·김제·익산 등지에 3,148정보의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한국 농민들을 수탈하고 있던 대표적 일본인 농장이다. 전북지역에서 비밀결사 활동을 하던 김창수와 김철수가 검거되면서 전북지역 사회운동이 부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이 일제 경찰은 전북지역 운동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고 1932년 봄부터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져 200여 명이 체포되어 4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때 고규영도 일경에 체포되어 1932년 4월 전라북도 경찰부를 거쳐 1933년 12월 4일 공판에 회부되었고, 1934년 3월 1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제1회 공판이 열려 42명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판결을 받았다. 이들과 함께 재판을 받던 고규영은 감옥에서 모진 병마에 걸려 보석되어 출옥하였으나 곧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1933. 12. 8, 1934. 3. 14)
- 조선중앙일보(1934. 3. 21)
- 金鐵柱 등 判決文(大邱覆審法院 : 1934. 11. 29)
- 金鐵柱 등 判決文(全州地方法院 : 1934.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