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일제가 1930년대 들어 탄압을 가중시키며 민족적·계급적 모순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이 고양되어 갔다. 1930년대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 등 대중운동이 한층 고양·확대되었다.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이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승인이 취소된 이후 당재건운동과 맞물려 혁명적 대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김옥남은 부안의 송림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사회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즈음 전북에서도 전주공립보통학교와 전주사립신흥학교, 이리공립농림학교 등을 중심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였다. 1931년 3월 전북 부안에서는 강희석(姜喜錫)의 권유로 백남철(白南哲)·신남근(辛南根)·임장수(林長壽) 등이 사회주의연구 및 노동자 획득을 위해 ‘부안노동조합’을 부활시켜야 한다는데 동의하여 결사를 조직하였다. 이어 4월 19일 결사 모임에서 사회주의이론을 연구하고 동지 확보에 노력할 것이며, 노동자·농민과의 제휴방침에 기초하여 매진할 것을 합의하였다.
김옥남은 1931년 4월 21일 백남철·박병득(朴丙得)·박예동(朴禮棟)과 부안에서 만나 사회주의 연구를 기획하고, 결사를 조직하여 노동조합 조직 및 노동자 획득에 노력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해 5월 9일 이 결사가 이전의 사회운동의 근본 정신에 위배된다는 강희석의 설명에 따라 해산하고, 사회주의연구와 노동자 획득에 관한 부안노동조합을 부활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부안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조사연락부에 김옥남·임장수, 독서부에 박병득·신남근, 경제부에 백남철, 조직선전부에 박예동·고광성으로 부서책임자를 정하였다. 이어 노동자들에게 임금이 낮은 것은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자본가가 착취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5월 30일 부안군 신안면에서 조직부 한치남, 선전부 김용선, 조사부 윤경서, 연락부 임재홍, 교육부 이석귀로 부서책임자를 정하고 노동자들의 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생활 때문에 타지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 6월 9일 결사를 해산하였다.
이같이 전북지방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1932년 봄부터 200여 명이 검거되어 4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1932년 6월 일제 경찰에 체포된 김옥남은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다. 3년이라는 긴 세월을 미결로 신음하던 그는 공판이 종결되어 4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전주형무소를 나오자 신병으로 전주의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 이튿날인 오후 5시경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全州地方法院:1934. 3. 31)
- 朝鮮日報(1934. 4. 10)
- 朝鮮中央日報(1934. 3. 21)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