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31년 4월경 이리공립농림학교 4학년 재학 중 양기주(梁基周)로부터 이리공립농림학교 학생들을 모아 공산주의 연구 독서회를 조직할 것을 권유받았다. 7월에는 김병륜(金炳倫)에게서도 공산주의 연구 독서회를 조직할 것을 재차 권유받아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강희석은 독서회를 조직하기 위해 협의했으나 중도에 퇴학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9월, 10월 12일~13일에 걸쳐 독서회 조직과 비밀리에 활동할 가두청년을 포섭하는 운동에 관해 협의했다.
1932년 3월 15일 옥구군(沃溝郡) 대야면(大野面) 복교리(福橋里)에서 고규영(高圭永)에게 부안군(扶安郡)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일으키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에 3월 30일 부안군 부녕면(扶寧面) 신흥리(新興里) 주막 뒷산에서 백남철(白南哲) 등에게 “공산주의 연구와 노동자 포섭을 위해 부안노동조합을 재건할 것으로 계획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백남철 등은 결사를 조직한 후 4월 19일 ‘마르크스주의 이론’연구와 비판을 하고, 노동자, 농민 등과 제휴한다는 방침 아래 동지 규합에 노력할 것을 협의했다.
강희석은 백남철 등이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사실을 듣고, 5월 9일 상서면(上西面) 용서리(龍西里) 공동묘지에서 “부안지역에서 따로 공산주의 이론 연구와 노동자 포섭 활동을 하는 것은 사회운동의 근본정신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남철 등 6명이 강희석의 말에 동의를 하자, 두 결사조직을 해소하고 하나의 결사로 조직했다.
강희석, 백남철 등은 5월 12일, 5월 14일, 5월 18일 윤경서(尹京西) 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포섭 활동을 했다. 이때 강희석은 “노동 임금이 저렴한 것은 노동자의 단결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자본가의 착취없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동자를 위해 활동할 노동조합의 부흥을 기도하고 있다”며 노동조합 재건에 동의를 구하고 다수의 노동자를 포섭할 것을 권유했다. 노동자들은 강희석 등의 주장에 찬성하고 노동조합 재건을 위한 실행사항을 협의했다. 5월 30일 이들은 신안면사무소(辛安面事務所) 근처 주막 고달경(高達京)의 집에서 조직부, 선전부, 조사부, 연락부, 교육부로 부서를 정하고, 노동자 포섭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러나 노동자 포섭이 뜻대로 되지 않은 채 6월 9일 해산됐다.
강희석은 부안군에서 공산주의 연구를 기획하고 노동운동을 위해 노동조합 조직을 준비하다가 체포됐다. 이후 전주형무소(全州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수형기간 만료로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전주지방법원:1934. 3. 31)
- 동아일보(東亞日報)(1933. 12. 8, 1934. 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