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30권(2025년 발간)
1923년경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내 소작인들은 지주 문재철(文在喆)의 아버지이자 토지 관리자인 암태면 와촌리(瓦村里)의 문태현(文泰炫)이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데 분개하여, 지주에게 저항하고 소작료를 줄이고자 하였다.
이에 서태석(徐邰晳)은 서창석(徐倉錫)과 공모하여 박필선(朴弼善)・손학진(孫學振) 이하 11명의 소작인들과 함께 암태청년회 주최 하에 1923년 12월 4일 암태소작인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서창석을 위원장으로 하고 김연태(金淵泰)・박필선・손학진 등을 집행위원으로 선임함으로써 암태소작인회가 성립되었고 회원이 약 500명이 되었다.
1924년 3월 27일 암태공립보통학교에서 암태소작인회와 청년회 주최 하에 면민대회를 개최했다. 약 400명의 면민이 모여 서창석을 의장에 선임하였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지주 문태현에게 소작료 저감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는다면 그의 송덕비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시대일보사 목포지국장 박응식(朴應植)의 조정으로, 문태현은 소작인회에 책임지고 연체된 전년도 소작료를 완납할 때, 소작인회의 요구에 따라 소작료를 저감하겠다고 하여 쌍방이 화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송덕비 파괴를 우려하여 이를 방지하려던 문태현・문중인・문명호(文明鎬) 등과 충돌하여 서태석・서창석의 지휘로 손학진 등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문명호 등을 구타하였다. 손학진 등은 문태현을 군중의 앞에 세워 소작료의 저감을 요구하며 응하지 않을 경우 송덕비를 파괴하겠다고 말하였다.
다음날 서태석・손학진 이하 12명과 소작인 약 400명은 다시 문태현의 송덕비 소재지에 모여 결의한 후 교섭위원을 선임했다. 서태석・서창석 등이 문태현을 찾아가서 다시 소작료 저감을 요구하여도 교섭이 타결되지 않았다. 약 200명의 군중이 문태현의 집에 가서 소리를 질렀고, 서태석이 교섭 결과 조정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자 서태석・손학진 이하 12명은 군중과 함께 문태현의 송덕비를 파괴하였다.
1924년 4월 14일 구류되어 같은 해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상해’, ‘주거침입’, ‘훼기’로 징역 8월을 받은 후, 1926년 8월 7일까지 수차 수감되어 총 1년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 : 1924. 9. 18)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 : 1925. 3. 13)
- 결정문決定文(고등법원 : 1925. 5. 1)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집행원부(執行原簿)
- 상고보조사건부(上告補助事件簿)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
- 동아일보(東亞日報)(1923. 12. 11, 1924. 5. 2, 7. 13, 9. 11, 1925. 3. 1, 5, 10, 4. 29)
- 조선일보(朝鮮日報)(1924. 4. 2, 12, 17, 6. 8, 8. 11, 12. 5, 9, 16, 12. 26, 1925. 2. 17, 3. 8, 6. 10, 1926. 7. 27, 12. 15, 1927. 4. 3, 1973. 2. 6)
- 시대일보(時代日報)(1924. 12. 7, 26, 1925. 1. 24, 1926. 7. 28)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0권 383면
-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과정」(박찬승, 『한국근현대사연구』 54, 한국근현대사학회, 2010) 1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