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월 담양청년회 순회 강연회 강사 및 집행위원, 같은 해 2월 이월회 집행위원, 해방운동자 조사위원, 전남청년대회 준비위원, 같은 해 4월 동아일보 담양지국 지국장, 조선노농총동맹 준비위원 및 전남기자대회 집행위원,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준비위원, 같은 해 8월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선정위원, 12월 동아일보 담양지국 기자로 활동함.
1926년 2월 담양농민조합연맹 서무부 위원,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집행위원, 3월 전남노동연맹 순회위원, 5월 담양노동연맹 위원, 7월 담양사회운동단체연합회 제정위원, 9월 담양청년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 중 담양사형사건에 연루되어 구류 처분을 받았고, 같은 해 11월 담양노동조합연맹위원회 신임위원으로 활동함.
1927년 1월 서울에서 노동운동사 간사, 3월 담양청년회 위원장, 4월 동회 집행위원 및 전남청년연맹 부의장, 7월 전남 광주군에서 조선공산당 담양야체이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미결 500일 산입)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농민총동맹 중앙위원 후보, 12월 담양정미노동조합 교섭위원으로 활동함.
1928년 1월 담양노동조합연맹 집행위원장, 2월 조선일보 담양지국장 및 신간회 담양지회 임시의장, 3월 담양노동연맹 중앙집행위원회 임시집행부, 1929년 1월 담양노동연맹 회장, 5월 신간회 담양지회 간사로 활동, 1931년 10월 담양노동조합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14년 송내호(宋乃浩)를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에 참여했다. 1922년 4월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水北面)에서 정규상(鄭圭相) 등과 함께 개량사숙기성회(改良私塾期成會)를 조직했다. 그 목적은 수북면 일대의 유지들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하여 보통학교 미취학 아동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있었다. 이즈음 담양 삼산학교(三山學校)의 총무로 활동했다. 1923년 3월~1925년 12월까지 동아일보사 담양지국장과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1923년 4월 6일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총회에 담양군 위원으로 참석했다. 7월 1일 위원회를 개최하여 지방부(地方部)를 창립하기로 하고 담양군 내 각 지역을 분담하여 창립총회를 위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10월 5일 담양군노농회(潭陽郡勞農會)에서 군 내 소작인회연합회(小作人聯合會)를 창립하고 위원을 맡았다. 1925년 1월 22일 담양청년회(潭陽靑年會) 집행위원으로, 2월 5일 이월회(二月會)의 집행위원으로 뽑혔다. 21일 전라남도 목포부(木浦府)에서 개최된 ‘해방운동자(解放運動者) 제1회 월례회’에서 조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22일 전남청년대회(全南靑年大會)를 발기하기로 하고, 그 준비위원으로서 곡성(谷城)·옥과(玉果)·구례(求禮) 지역을 맡아 순회했다.
1925년 4월 6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을 맡았다. 13일 장성군(長城郡)에서 개최된 전남기자대회(全南記者大會)에서 임시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일본 당국의 민중운동자대회 금지에 맞서 조직된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 발기준비위원이 되었다. 4월 17일 자로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취지서」를 작성했다. 1925년 8월 24일 전남해방운동자(全南解放運動者同盟)에서 조직한 수해구제회(水害救濟會)의 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2월 담양군 내 각 소작인회가 농민조합으로 개편되고 ‘담양군 소작인회연합회’가 ‘담양군 농민조합연맹’으로 개편될 때 서무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22일 전남해방운동자동맹(全南解放運動者同盟)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3월 광주(光州)에서 전남노동연맹(全南勞動聯盟)을 발기하고 준비위원으로서 담양을 비롯해 곡성 등 6개 군의 순회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 담양노동연맹(潭陽勞動聯盟)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6년 7월 23일 담양군 내 담양청년회, 담양여자청년회(潭陽女子靑年會), 담양노동청년회(潭陽勞動靑年會) 등이 연합하여 담양사회운동단체연합회(潭陽社會運動團體聯合會)를 창립하기로 했다. 그 강령 및 규약 제정위원(制定委員)으로 선정되었다. 9월 5일 담양청년회 집행위원장으로서 각 단체 연합으로 국제청년데이 기념식을 거행한 뒤 6개 사회운동단체 대표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담양의 중요사항에 대한 조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8일 ‘담양 사형(私刑) 사건’, ‘윤이현(尹以玄) 피살 사건’, ‘모 교회 사건’ 등의 3대 사건 조사내용을 보고했다. 9일 밤 ‘사형 사건’의 진상을 상세히 보고하던 중 담양경찰서(潭陽警察署)에 구금되어 취조를 받았다. 10일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되어 2주간 구류(拘留)되었다.
1926년 10월 담양청년회와 담양노동청년회 주최로 추수기(秋收期)를 맞아 착취당하는 대다수 소작농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순회강연대가 조직되어 20일부터 8일간 순회할 때 이인섭(李仁燮) 등과 함께 제3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30일 담양노동조합연맹(潭陽勞動組合聯盟)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1월 김용표(金容杓)와 함께 옥과노동조합(玉果勞動組合) 정미부(精米部)의 동맹파업(同盟罷業) 조사를 실시했다. 잡지 『노동운동』을 간행하는 서울의 노동운동사(勞動運動社) 간사를 맡았다. 4월 24일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 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9월 7일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으로 분립될 때, 전라남도를 대표하여 농민총동맹 중앙위원 후보로 뽑혔다. 10일 담양군 대전면(大田面)에서 대전청년회(大田靑年會)를 창립했다. 12월 6일 담양정미노동조합(潭陽精米勞動組合)의 임시집행부가 되었다. 김거명(金巨明) 등과 함께 정미업자와의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7월 하순경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광주면(光州面) 강석봉(姜錫奉) 집에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전라남도 당대회에 참석했다. 10월경부터 정경인(鄭璟仁)과 함께 ‘조선공산당 담양야체이카’를 조직하고 책임자를 맡았다. 12월 『동아일보』 기자를 사임하고 1928년부터 『조선일보(朝鮮日報)』 지국장으로 활동했다.
1928년 2월 11일 임시의장을 맡아 신간회(新幹會) 담양지회(潭陽支會)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26일 담양노동연맹 중앙집행위원회 및 간사회에서 정경인과 함께 임시집행부로 선정되었다. 이후 회장으로 활동했다.
1928년 9월경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담양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1931년 8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담양노동조합 간부 등으로 사회운동을 계속했다. 1931년 10월 25일 시마사키정미소(島崎精米所)의 부당한 현미 운송 등에 맞서서 담양노동조합원 50여 명과 항거하다가 담양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1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폭력행위취체규칙 위반 및 업무방해죄’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광주형무소(光州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2년 5월 24일에 출옥했다. 출옥 후 1933년 3월 초순경 또 다시 검속되었다가 같은 달 28일에 석방되었다. 이후 곧바로 ‘장성협동조합(長城協同組合)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북도경찰부(全羅北道警察部)에 체포되었고, 같은 해 10월경까지 계속 취조를 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1. 8. 1, 1922. 4. 13, 1923. 1. 31, 3. 7, 4. 19, 9. 20, 1924. 10. 11, 1925. 1. 28, 2. 9, 2. 25~26, 4. 7, 4. 11, 4. 16, 8. 3, 9. 15, 12. 23, 1926. 1. 24, 2. 19, 2. 25, 3. 3~5, 7. 28, 9. 8, 9. 12, 10. 19, 11. 3, 1927. 1. 5, 1. 25, 3. 16, 3. 30, 4. 7, 4. 16, 4. 27, 8. 23, 9. 9, 9. 15, 11. 14, 12. 10~11, 12. 27, 1928. 1. 6~7, 2. 15, 2. 17, 3. 1, 1929. 1. 5, 1930. 12. 1~2, 12. 4, 12. 9, 12. 23, 1931. 8. 11, 10. 28, 11. 2, 11. 24, 12. 2, 1933. 7. 10, 10. 6)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1993) 별집 제7집 429면
-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