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19년 3월 20일 경남 합천군(陜川郡) 대병면(大幷面) 창리(倉里)에서 임상종(林尙鍾)·권영두(權寧斗)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초순 대병면에 사는 학생 정태섭(鄭泰燮)은 서울의 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한 후 독립선언서를 소지하고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임상종 역시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방 유지를 초청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거사를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외준은 유인수(柳仁秀)·권중박(權重璞)·정학성(鄭鶴成)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하고 밀의를 거듭한 후 거사일을 3월 20일 창리 장날로 잡았다. 이들은 역평리(嶧坪里)에서 선언서를 등사하고 대소의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각 마을을 순방하면서 동지 규합에 나섰다.
거사 당일 이들은 필요한 준비물을 몰래 감추어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1시경 장에 모인 군중은 약 3,000명으로 늘어났고, 이때 권영두는 군중 앞에 나서 독립 쟁취를 역설하였다. 선언서와 태극기가 배부되고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운 가운데 주동 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대는 시장을 누비면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창리 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때 선두에 있던 이병추(李秉樞)에게 일경은 실탄 사격을 가하여 유혈이 낭자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주재소 내로 밀어닥쳐 일인 경찰부장과 경찰을 구타하고 주재소 기물을 파괴하고 각종 문서를 전부 소각해 버렸다. 시위대는 다시 대병면사무소로 달려가 건물과 기구를 파괴하고 서류 등을 전부 태워 버렸다. 급보에 의해 출동한 헌병은 총을 난사하고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수십 명을 체포하였다.
이외준은 이날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9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釜山地方法院 晉州支廳:1919. 9. 15)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327~3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