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월 12일 경 인천 (仁川) 자택에서 안문식 (安文植) 등과 함께 인천적색노동조합 (仁川赤色勞動組合) 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후 동지 (同志) 획득 및 조합의 확대 강화에 대해 2회 협의하고, 동년 (同年) 9월 10일 동소 (同所) 에서 정태옥 (鄭泰玉) 과 적색노동조합조직운동 (赤色勞動組合組織運動) 과 공청재건운동 (共靑再建運動) 의 제휴활동에 대해 협의하여 동월 (同月) 13일 정태옥 (鄭泰玉) , 신수복 (愼壽福) 등과 함께 조선공산청년회재건 인천조직준비위원회 (朝鮮共産靑年會再建仁川組織準備委員會) 를 조직하고 그 목적 수행을 위해 9월 15일부터 10월 중순까지 자택에서 2회 위원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한영돌은 어려서 1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을 뿐, 그 후 18세 경까지 인천에서 제승업(製繩業)·정미업 또는 부두에서 노동에 종사하였다.
1932년 1월 12일 경 인천 자택에서 안문식(安文植) 등과 함께 조국독립 및 신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인천노동조합(仁川勞動組合)’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10일 자신의 집에서 정태옥(鄭泰玉)과 노동조합 조직운동 및 공청재건운동의 제휴 활동에 대해 협의하고, 같은 달 13일 정태옥·신수복(愼壽福) 등과 함께 ‘조선공산청년회재건 인천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방법에 대해 협의하는 한편, 9월 15일부터 10월 중순 경까지 위원회를 개최하여 활동방침, 교양방법 등을 논의하였다.
1931년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과 1932년 제2차 조선공산청년동맹재건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한영돌은 1935년 10월 2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재소자신분카드(咸興刑務所)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東亞日報(1934. 6. 7, 1935. 9. 27)
- 判決文(咸興地方法院:1935. 10. 25)
- 朝鮮中央日報(1935.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