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양정은 보부상을 했던 경력으로 1919년 제2회 한국독립선언서에 상공단의 대표자에 서명하고, 그것을 배포시킨 일에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대동단의 활동 근거지를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국내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이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대동단(大同團, 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였다. 대동단은 진신단(縉紳團)·유림단(儒林團)·군인단(軍人團)·부인단(婦人團)·상공단(商工團)·청년단(靑年團)·지방단(地方團), 기타 몇 개의 단으로 나누어 8월경부터 제2 독립선언서 낭독을 위한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양정은 1919년 8월경, 10년 지기인 전협(全協)으로부터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의 설립 목적과 취지를 듣고 가입하여 상공단장(商工團長)이 되어, 보부상을 규합하여 인쇄물을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본부를 상해로 이전하기로 결심하고 10월 10일 총재 김가진의 상해 망명을 단행하였다. 이어 전협·김가진·정남용(鄭南用)·한기동(韓基東)·나창헌(羅昌憲) 등과 협의하여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포섭하여 상해 망명을 추진하는 등, 11월 27일 오후 5시를 기하여 광화문 앞 광장에서 제2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양정은 전국 각도에 36명의 보부상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시킬 여비 1인당 100원, 즉 3,600원을 지출하였다. 그리고 전협으로부터 받은 540원을 주고 자기 아내의 명의로 구입한 예지동 집을 주고 근거지로 삼았다. 동지 권태석이 검거되자, 매우 낙담한 전협을 위로하며, “절대 걱정하지 마라. 무릇 중대한 일을 기획하는데 그런 정도의 장해는 흔히 있는 것이므로 굳이 비관할 필요없다. 결코 신고하지 말고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해야한다”고 격려했다.
나창헌 등이 「선언서」 인쇄에 착수 중, 11월 19일경 체포되었다. 양정은 192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豫審判決書(京城地方法院:1920. 6. 28)
- 독립신문(1920. 1. 1)
- 東亞日報(1920. 6. 29, 7. 3)
- 騎驢隨筆(宋相燾, 1971) 26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6집 300~315면
- 대동단실기(신복룡, 2003) 63, 68, 153면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20. 12. 7)
- 楊楨 審問調査書(제1회, 1919. 11. 20)·(제2회, 1919. 12. 1)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제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