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 YMCA 청년학관 영어과 재학 중 종로 (鍾路) 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 (逮捕) 되었으며, 1920년 중국 (中國) 상해 (上海) 에서『독립신문 (獨立新聞) 』의 기자로 활동하였고 1921년 조선 (朝鮮) 으로 돌아와『신생활 (新生活) 』,『조선지광 (朝鮮之光) 』의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10월 정재달 (鄭在達) ·송종건 (宋鍾建) 등과 신사상 (新思想) 을 선전하였다가 체포 (逮捕) 되었고,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에 가입하였으며 동년 6월 조직부장 (組織部長) 으로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新社會)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 (逮捕) 되어 1929년 2월 징역 6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이성태는 서울에서 조선기독청년학관[ymca] 영어과를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합세하여 종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3월 5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신문을 받았다.
1920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자로 활동하다가 192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신생활(新生活)』·『조선지광(朝鮮之光)』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그는 한국의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민중사(民衆社)’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사회주의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1924년 10월에는 정재달(鄭在達)·송종건(宋鍾建) 등과 ‘신사상’을 일반에 소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히기도 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대회에서 조직부 담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한국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선지광』의 책임자가 되었다.
일제에 의해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었던 이성태는 또다시 일경에 붙잡혀 1929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며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29. 2. 27)
- 스탈린 시대(1934~38) 정치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모스크바, 2004) 5권 57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13권
- 時代日報(1924. 10. 23)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姜萬吉·成大慶, 1996) 343면
- 東亞日報(1923. 9. 1, 1924. 10. 19, 10·23, 1928. 7. 12, 1929. 2. 21, 7. 25)
- 中外日報(1928. 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