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함경남도 덕원(德原)과 원산(原山) 등지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박휘병은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와『동아일보』원산지국 기자를 지냈다. 1925년 무렵에는 당우청년회(堂隅靑年會)와 당우농민동맹의 집행위원을 지내며 농민야학과 농민 권익확보를 위해 힘썼다.
1927년 10월 덕원청년동맹(德源靑年同盟) 결성에 참여한 박휘병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1월에는 덕원청년동맹 당우지부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했다. 이듬해 2월에는 신간회 덕원지회에 가입하여 민족 독립을 위한 좌우합작에 힘쓰기도 했다.
박휘병은 덕원을 중심으로 원산 등지로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고려공산청년회 덕원야체이카를 재건했고, 이어 고려공청 함경남도 간부기관 결성을 주도하여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소위 ‘함남 공청’사건으로 일경에 붙잡혀 1931년 5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석방 뒤 박휘병은 1933년 3월 덕원적색노동조합(德源赤色勞動組合)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으나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원산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그는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당시 의문스런 죽음에 원산지방법원조차 담당 고등계 경찰을 조사하였는데 결국 상해치사로 판명되었다. 그의 장례는 원산에서 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中外日報(1927. 11. 17, 1928. 2. 9)
- 朝鮮中央日報(1933. 3. 17)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姜萬吉·成大慶: 1996) 220면
- 東亞日報(1933. 3. 17,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