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41년 4월 전주사범학교(全州師範學校) 심상과(尋常科)에 입학 후 학생들에 대한 담임교사의 민족차별을 경험하면서 반일감정이 커져가던 중 1943년 7월경부터 학교 직원인 황용순의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즈음 함께 동거 중이던 전주사범학교 학생에게 “김일성(金日成)은 만주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으니 우리가 숭배할 만한 지사(志士)이다”라고 했다. 또 같은 해 8월 중순경에는 “황용순은 김일성과 연락이 되는 모양이니 장차 나도 황용순의 부하가 되어 조선독립을 위해 싸울 생각이다”라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즈음 황용순의 집에서 그로부터 “조선인은 현재 일본인에게 압박당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장차 어떻게 해서라도 조선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 9월 상순경 “조선은 장차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손으로 독립시키지 않으면 안 되니 그때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신체를 단련해두는 게 필요하다”라고 얘기하였다. 같은 해 10월 초순경 황용순으로부터 “장차 소·일 전쟁이 일어나면 여수항(麗水港)에 상륙한 일본군은 반드시 이 도로를 통과할 것이다. 현재 실시 중인 도로확장공사도 그때 전차(戰車)의 통행을 예측하여 착수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유종남은 “그때는 이곳에서 돌을 떨어뜨려 일본군의 통과를 방해하자”라고 응대하였다.
1944년 들어서도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소·일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을 패전으로 이끌고 서로 제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하였다. 1944년 1월 2일에는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화산면(華山面) 화월리(化月里)에서 황용순으로부터 “우리 청년은 크게 조선독립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이 없는 우리에게는 축제일도 없으니 일본인의 기쁜 축제일에는 쓸쓸함을 참을 수가 없다. 손기정(孫基禎)은 조선인으로는 아니었지만 세계 제일의 이름을 날리지 않았는가? 우리도 계속 참고 노력하면 무엇이라도 큰일을 할 수 있다”라는 얘기를 듣고, 유종남 역시 이에 공감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1월 중순경 황용순의 집에서 신체를 단련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조선의 독립은 3~4월경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같은 해 2월 5일경에도 황용순의 집에서 8명의 학생들에게 “학교에서는 일본인 생도와 차별대우가 있고, 또 일반 사회에서도 종종 물자의 배급 등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인은 현재 일본인에게 압박을 받고 있으니 장차 조선은 우리의 힘으로 독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모두 신체를 단련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재차 강조하였다. 또 같은 달 중순경에도 “김일성은 소련과 손을 잡고 있고 사이가 좋으니 장차 소련은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다. 우리가 조선독립을 위해서 분투하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와 같이 1943년 7월부터 1944년 2월 사이에 동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여러 차례 협의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4년 11월 27일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장기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전주지방법원:1944.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