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에서 발행한 독립공채의 배부를 통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해운은 1921년 4월 1일 경성 소격동(昭格洞)에서 동향 출신으로 상해에서 파견된 민정식(閔庭植)으로부터 독립공채 액면 100원 3통을 받았다. 이때 민정식은 안성군(安城郡) 서운면(瑞雲面) 산평리(山坪里)의 민만식(閔晩植)을 찾아가 이를 제시하고 군자금을 받아오라고 권유하였다. 전해운은 다시 소격동의 이영휘(李英輝)에게 이 공채를 교부하고 직접 민만식에게 받아오라고 지시하였다. 음력 3월 4일경 이영휘는 민만식의 집으로 찾아가 공채를 교부하고 군자금 100원을 받았다. 이후 음성(陰城), 충주(忠州), 제천(堤川) 등지의 자산가에게 독립공채를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향후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동지 6명과 함께 종로의 중국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 장소가 제일루(第一樓)였기 때문에, 속칭 '제일루사건'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전해운은 1921년 8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21. 8. 26)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朝鮮日報(1921. 6. 10)
- 東亞日報(1921. 8. 20, 8. 27,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