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19년 3월 초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黃道文)이 서울의 독립운동 유인물을 갖고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 유진봉의 집에서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다. 3월 5~6일경 강화군 부내면 선두리(船頭里) 유희철(劉熙哲)의 집에서 예수교도인 유학용 등 7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협의했다. 주도 인사들은 각자 동지들을 규합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유봉진은 서도면(西島面) 주문도(注文島)에서 장윤백(張允伯) 등을 만났다. 또한 염성오(廉成五)・박영칠(朴永七)・장덕기(張德基) 등과 함께 3월 18일 강화 읍내로 나갔다. 오후 2시경 군중들이 ‘조선독립’이라고 적힌 깃발을 앞세우고 구한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유학용은 석교 부근에서 6명과 함께 있다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 군중과 신문리 시장 일대를 활보했다. 시위 군중은 군청, 객사, 공자묘 등을 순회했으며, 그 수는 1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유학용은 만세운동 참가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4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칙령(勅令) 제120호에 의해 징역 1월 15일로 변경되어 5월 23일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20. 4. 8)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1996) 제26집 234~2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