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신사상에 입각한 일본 제국주의 반대투쟁을 전개하다 옥중에서 희생되었다.
이재유는 1925년 개성(開城) 송도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 민족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일제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가 퇴학당하였다.
12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시내 사립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3개월 만에 퇴학당하였다. 이후 일본노동조합평의회 계열의 동경합동노동조합(東京合同勞動組合)에 가입하고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1927년 11월 이재유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후보위원이 되었으며, 1928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가입하고, 5월에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미결구류 500일 통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12월 21일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 이재유는 종래의 파벌에 의한 운동을 배격하고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하여 조선일보사를 통한 언론활동, 공장중심 노동조합 조직, 지방별 농민조합 조직, 독서회를 통한 학생운동 지도 등 부문별 운동을 통해 반제 독립의 기반을 조성하려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34년 1월 21일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당하여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4월 14일 간수가 순시를 하던 틈을 이용해 탈옥하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미야케(三宅鹿之助)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미야케가 체포되자 도로공사장 인부로 위장하고 기회를 엿보아 다시 경성재건그룹을 조직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이재유는 1936년 12월 2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지금의 도봉구 창동)에서 농부로 위장해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1938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미결구류 150일 통산)을 받고, 1942년 9월 12일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비전향자라 하여 출옥하지 못하고, 1944년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朝鮮共産黨再建京城準備그룹事件檢擧의 件(京高特秘 제400호 1937. 2. 19) 思想에 關한 情報綴 3
- 朝鮮中央日報(1935. 11. 8)
- 東亞日報(1935. 12. 28)
- 朝鮮日報(1936. 12. 29)
- 社會科學大辭典(李錫台, 1948)
- 이재유연구(김경일, 2006)
- 豫審終結決定(京城地方法院:1938. 2. 17)
- 治安維持法違反 犯人 李載裕 檢擧에 관한 件(京畿道警察部, 1936. 12. 28)
- 朝鮮民族解放英雄的鬪士 李載裕 脫出記(金剛山人, 신천지, 1946. 4)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