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28년 10월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에 학생운동 비밀결사인 독서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동맹휴교 사건으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9년 4월 교토(京都) 성봉중학교(聖峰中學校) 4학년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에 가입해 활동하다 같은 해 7월에 퇴학당했다.
1930년 5월 18일 정오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君) 현풍청년회관에서 개최한 현풍청년동맹(玄風靑年同盟) 임시총회에서 교양부 임원으로 선출됐다. 7월 15일 오후 3시 대구경찰서(大邱警察署)서 형사와 대구헌병대(大邱憲兵隊) 헌병의 감시 가운데 개최된 월례강좌에서 ‘조선문법’을 주제로 연설했다. 그러나 이상규(李相奎)의 연설 등에 ‘불온’한 문구가 있다고 해 원고를 압수당하고 강좌는 중지당했다. 8월 7일 오후 2시 정기총회를 개최한 후 곽수범은 이상규와 함께 체포됐다. 두 사람은 대구경찰서 고등계주임에게 현풍청년동맹의 집회 금지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고등계주임은 현풍청년동맹이 계급의식을 북돋우는 ‘불온’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편 1931년 6월 30일 김일식(金一植) 등은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해 제1, 제2 클럽으로 나뉘어 활동했다. 곽수범은 같은 해 8월에 김일식의 권유로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해 공산주의 연구 토론을 했다. 7월경 사회과학연구회는 학생지도부를 구성해 중등학교 학생 포섭 활동을 했으며, 8월에는 전위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산하에 서기국 등의 부서를 두었다. 곽수범은 김홍직(金洪直)과 함께 전위조직준비위원회 연락부 책임을 맡았다. 이어 11월 대구 내 노동자의 공산주의화를 꾀하기 위해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赤色勞動組合建設大邱協議會)가 비밀리에 조직됐다. 곽수범은 이에 가입해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후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와 보병 제80연대에 반전(反戰) 운동 ‘삐라’가 뿌려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구헌병대와 대구경찰서는 12월 2일~4일 교남학교(嶠南學校) 4학년 백춘갑(白春甲)을 체포하고 동시에 곽수범이 운영하던 서점도 수색했다. 이로 인해 일명 ‘대구 군대 격문사건’의 조종자로 곽수범을 포함해 9명이 체포됐다. 1932년 2월 8일 일제는 이들을 일명 ‘푸로’과학연구소 조선제1호지국 사건, 사회과학연구회 사건, 반전 ‘삐라’ 사건, 대구사범학교 적화 사건의 관계자로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 검사국(檢事局)으로 송치하고 취조했다. 당시 서점을 운영하던 곽수범은 잡지 『인터내셔널』, 『프롤레타리아 정치교정(政治敎程)』, 『청년운동의 이론과 조직』, 『청년코민테른 강령』 등 ‘좌경’서적을 발매해 배포했다는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곽수범은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체포됐다. 1932년 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出版法) 위반’으로 기소돼 금고 4월, 벌금 20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2월 2일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다시 기소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어 12월 19일에는 지난 1월 29일 선고받은 집행유예가 취소돼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법원:1932. 12. 2)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제39권 2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