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25년 10월 대구청년연맹(大邱靑年聯盟) 발기회(發起會)의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7월 24일 대구지역 청년단체가 연합하여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이 조직될 때 그 집행위원 및 조사부원(調査部員)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8월 7일 대구청년동맹 주최로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 등 11개 단체가 모여 일본군 제80연대 소속 육군대위 세카와(賴川正雄)의 만행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할 때, 조사위원으로서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고 격문 배포와 시민대회 개최 등을 주도하는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실행위원으로서 제80연대장을 면담하여 시민대회에 보고하는 면담위원으로도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박명줄은 1927년 2월 신간회 대구지회가 결성된 후 9월경부터 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1924년 1월 5일 ‘니주바시(二重橋) 폭탄사건’으로 체포된 김지섭(金祉燮)이 1928년 2월 20일 치바형무소(千葉刑務所)에서 순국했다. 27일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으로 안장될 때 대표로 안동까지 수상(隨喪)하였다. 3월 경상북도 김천(金泉)의 금릉학원(金陵學院)을 일제당국이 폐쇄하자 대구청년동맹에서 반대성명서를 발표하고 폐쇄명령 철회를 요구했다. 이때 도(道) 당국 교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 13일 대구청년동맹 정기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7월 4일 사임한 후 검사부장(檢査部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12월 15일 류연술(柳淵述) 등과 함께 대구경찰서(大邱警察署)에 검속되었다가, 29일 풀려났다.
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2월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 학생 문학봉(文學奉) 등을 통해 대구지역에서도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이 일로 인해 1930년 1월 12일 문학봉 등 학생들이 검거되고, 14일 신간회 대구지회 간부 3명과 함께 또 다시 검거되었다. 21일 구류 29일 처분을 받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른 후 2월 19일에 풀려났다. 당시 박명줄은 신간회 대구지회 상무위원(常務委員)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19일 개최된 임시대회에서는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3월 중순경 신간회 대구지회 간부 정윤(鄭潤)과 함께 또 다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당시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에서 취조 중이던 차재정(車載貞)·임윤재(任允宰) 등의 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27일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출옥하였다.
7월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계면(安溪面)에서 허호일(許鎬逸)·박인환(朴寅煥) 등의 도움으로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지국(支局)을 경영하면서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1932년 7월부터는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안계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안계로 이주한 박명줄은 먼저 그 지역의 청년 박근주(朴根疇) 등을 동지로 규합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안계면과 단북면(丹北面) 내 각 마을의 농민 집회소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친목회 성격의 ‘농민계(農民契)’를 조직하고 300여 명의 회원을 모집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문자보급운동(文字普及運動)을 계기로 또 다시 13개소에 문자보급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에는 박명줄의 부인 김귀숙(金貴淑)의 활약도 컸다고 한다.
박명줄은 비합법적·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성군 내 각 지역 농민들과의 회합에서는 소작농에 대한 지주의 불합리한 착취, 농민의 각성과 단결 촉구, 농민조합 결성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였다. 예컨대 1931년 2월 상순경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안계면 토매동(土梅洞)을 중심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안계면에서 안계농민조합(安溪農民組合)을 결성하였다. 당시 안계면의 흥산계(興産契)의 단원 수만 339명에 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인근의 단북면 등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5개 면에 조직을 꾸려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일환으로 군(郡) 단위의 의성농민조합(義誠農民組合)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흥산계(興産契)가 의성경찰서(義誠警察署)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에 맞서 흥산계 탄압 반대 시위를 주도하였다. 안계농민조합원들은 ‘농민조합 만세!’라고 쓴 깃발 수십 개를 만들어 안계면과 의성읍을 오가며 탄압 반대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의성독서회(義誠讀書會) 사건’에서 단서를 얻은 일본 경찰은 1933년 10월 4일부터 대대적인 검거를 개시하여 무려 900여 명을 붙잡아가서 취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명줄도 체포되었다. 12월 17일 안계농민조합 간부 5명과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다. 27일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석방되고 박명줄만 예심에 회부되어, 1934년 5월 29일 예심이 종결되었다. 11월 9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으나, 1935년 3월 30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기각되어 징역 2년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6년 7월 23일 형 집행 만기로 출옥하였다. 이후 다시 대구로 이주하여 신문사 기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법원:1934. 11. 9)
- 판결문(대구복심법원:1935. 3. 30)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동아일보(東亞日報)(1928. 2. 28, 3. 2, 4. 8, 5. 16, 1930. 3. 18, 3. 29, 1933. 8. 3, 11. 29, 12. 20, 1936. 7. 29)
- 시대일보(時代日報)(1925. 10. 27)
- 중외일보(中外日報)(1927. 7. 26, 8. 9, 8. 12, 1928. 7. 4, 7. 9, 1930. 1. 5, 1. 17, 1. 21, 2. 22, 3. 18, 4. 6, 4. 21, 5. 20)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3. 11. 13~14, 11. 30, 12. 21~22, 12. 29, 1934. 11. 4, 11. 12, 1935. 3. 25)
- 매일신보(每日申報)(1927. 7. 27, 8. 10, 11. 12, 1930. 4. 7, 1933. 11. 13, 11. 29, 12. 21)
- 학생사건(學生事件) 인쇄물(印刷物) 송부(送付)에 관한 건(조선총독부 경무국:1930. 2. 15)
- 사상휘보(思想彙報)(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5) 제3호 7면
- 한국민족해방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993) 제4권 81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188면
- 향토문화전자대전(의성안계적색농민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