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3월 16일 경북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는 안평면(安平面) 괴산동(槐山洞) 교회 목사인 김원휘(金原輝)와 박영화(朴永和)가 쌍계동 교회 목사인 박영달(朴永達)을 만나 협의하면서 계획되었다.
이들은 같은 마을의 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 등과도 협의를 하여 찬동을 구하였다. 이때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다니던 박영화의 장남 박상동(朴尙東)이 대구의 만세시위 때 사용되었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대구의 거사소식을 상세히 전하였다.
이들은 3월 16일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의하고,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2백여 매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 정오경 쌍계동 박영신의 집 앞에는 2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였고 이들은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때 시위대열에 동참하여 동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군중들과 함께 뒷산으로 이동하여 시위를 계속한 뒤 해산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369∼370면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義城支廳, 1919.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