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2월 경 원기풍 (元基豊) 과 40여명으로 구성된 의진 (義陣) 을 조직한 후 차도선 의진 (車道善義陣) 과 협력하면서 함남 (咸南) 갑산 (甲山) , 홍원 (洪原) , 북청 (北靑)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 하였고, 1908년 3월 이후 홍범도 의진 (洪範圖義陣) 에 소속되어 부장 (副將) 이 된 후 1908년 4월 경 함남 (咸南) 북청 (北靑) 북방 니곡사 (泥谷社) , 안산사 (安山社) 부근에서 5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활동하였고 이후 갑산 (甲山) 으로 이동하여 1908년 6월 경 함남 (咸南) 갑산 (甲山) 의 김창 (金昌) 부근에서 일경 (日警) 과 싸우다 전사 순국 (戰死殉國) 한 사실 (事實) 이 확인 (確認)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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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의병장(義兵將)으로 함경남도 갑산(甲山)·홍원(洪原)·북청(北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동률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무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2월 경 북청군 니곡사(泥谷社) 부근에서 원기풍(元基豊)과 함께 40여 명의 병력으로 거의하여, 차도선(車道善) 의진과 협력하며 함남 갑산(甲山)·북청(北靑)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1908년 3월∼5월 사이 홍범도(洪範圖) 의진에 소속되어 부장(副將)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4월 약 9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북청군 니곡사 삼기리(三岐里) 및 통파(通坡) 부근에서 활동하다가 진을 나누어 최동률은 약 50여 명을 이끌고 갑산(甲山) 방면으로, 원기풍은 약 40여 명을 이끌고 함흥(咸興) 방면으로 각각 진출하였다. 이후 1908년 6월 경 갑산군 금창(金昌)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1輯 311面(暴徒에 관한 編冊 北秘 제190호 1908. 6. 28)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輯(暴徒史編輯資料) 642∼643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0輯 432面(暴徒에 관한 編冊 暴徒討伐景況 제73호 1908. 4. 28)
- 大韓帝國期 義兵硏究(朴敏泳) 171·202·203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