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전남 영암(靈巖) 사람이다. 박사화(朴士化)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의병활동에 나선 박사화는 1908년 2월 전남 함평(咸平)에서 거의한 심남일(沈南一) 의진에 참가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이들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강진(康津)에서 일본군 수백명과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접전을 벌여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며 기세를 떨쳤다. 이후 이들은 남평·능주·영암·나주·장흥·해남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밖에도 이들은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친일 밀정과 관료들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후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의병장으로 선임된 박사화는 같은 해 10월 전남 능주(綾州)에서 일군과 교전하는 등 1909년 가을까지 전남 나주·영산포·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이복근은 이와 같은 박사화의진에 소속되어 1909년 6월 나주군 욱곡면(郁谷面) 방축동(防築洞)에서 일본 헌병과 보조원 4명을 기습 공격하여 헌병 1명을 부상시키고 보조원 1명을 사살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또한 7월에는 영암군 종남면(終南面) 화수동(花水洞)에서 친일 동장 김치수(金致水)를 처단하였으며, 지도군(智島郡) 압해면(押海面)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그러나 불행히도 일군에 체포되어 1910년 2월 19일 대구공소원에서 소위 폭동, 모살(謀殺)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이해 3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됨으로써 4월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內閣告示(奎章閣 所藏)
- 統監府來案(奎章閣 所藏) 第1卷 1909∼1910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