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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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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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金得敬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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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6 훈격 애국장
1909년 4월 경남(慶南) 의령(宜寧), 함안(咸安) 등지에서 일본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활동하였고, 체포(逮捕)되자 호송 중 탈출하다가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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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여갔다. 나아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전쟁은 처음에는 전기의병과 같은 대회전(大會戰) 방식이었으나 1906년 말부터는 소부대에 의한 유격전 방식으로 변해 갔다. 때문에 의병의 거점도 향교 같은 곳이 아니라 읍성(邑城)이나 산성이었고 나중에 유격전으로 변해가면서는 산악으로 옮겨갔다. 또한 평소 일제의 정책에 부화뇌동하던 친일관료와 일제에 기생하며 민족적 과제를 외면하던 부일배 역시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의병활동 역시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투 뿐 아니라 군자금 모집, 친일관료 응징 등으로 표현되었다. 아울러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김득경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국권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1909년 4월 경남 의령군(宜寧郡) 용암면(龍岩面)에서 동료 의병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함안군(咸安郡) 상리면(上里面)에서 추격해 온 일본 수비대에 붙잡히자 틈을 보아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4輯 83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득경 - - 후기의병
본문
출생 시기나 출신지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09년 의병 활동 당시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및 의령군(宜寧郡)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아 인근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해산 등의 영향으로 의병전쟁이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경남 지방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주로 하동군(河東郡)·산청군(山淸郡)·의령군·단성군(丹城郡)·거창군(居昌郡) 등 지리산 인근에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09년 들어 지역 내 의병 활동이 감소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의령군 및 함안군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료 의병들과 함께 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4월 동지 6명과 함께 의령군 용암면(龍岩面)에 사는 전무진(田珷鎭)과 이인세(李仁世)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 제공을 의뢰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탐지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의병 1명이 죽고 조맹장(趙孟章)이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조맹장을 조사하여 의령군 및 함안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의령 주재 순사 3명과 일본군 수비대 5명 등이 4월 16일 함안군 남산면(南山面) 거주 박덕수(朴德守)를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신 다른 의병들의 소재를 파악하여 함안군 상리면(上里面) 인근을 수색하였다. 일본군 수비대가 압박해오자 정종도(鄭鍾道)와 함께 몸을 피하여 상리면 남쪽 숲속에 숨어있었다. 그러다가 인근을 수색하던 일본군 수비대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일본군의 조사과정에서 용암면에서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갖고 있던 화승총 2정은 일본군에게 압수되었다. 함께 붙잡힌 정종도 및 조맹장과 함께 호송 도중 밤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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