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여갔다. 나아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전쟁은 처음에는 전기의병과 같은 대회전(大會戰) 방식이었으나 1906년 말부터는 소부대에 의한 유격전 방식으로 변해 갔다. 때문에 의병의 거점도 향교 같은 곳이 아니라 읍성(邑城)이나 산성이었고 나중에 유격전으로 변해가면서는 산악으로 옮겨갔다. 또한 평소 일제의 정책에 부화뇌동하던 친일관료와 일제에 기생하며 민족적 과제를 외면하던 부일배 역시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의병활동 역시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투 뿐 아니라 군자금 모집, 친일관료 응징 등으로 표현되었다. 아울러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김득경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국권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1909년 4월 경남 의령군(宜寧郡) 용암면(龍岩面)에서 동료 의병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함안군(咸安郡) 상리면(上里面)에서 추격해 온 일본 수비대에 붙잡히자 틈을 보아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4輯 83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