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
만주에서 정의부(正義府)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창신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6개월만에 졸업하였다. 1910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 5월 15일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북장로회의 파견으로 만주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1년간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대화사(大花斜)에 예배당을 설립하였다.
1917년부터 평북노회의 선교활동을 그만두고 삼원보지역 다섯 교회의 목사로서 일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삼원보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1924년 8월 이래 정의부 계통 학교인 유하현 삼원보 소재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1928년 음력 6월 사임할 때까지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吉林)에서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조직 당시부터 자치활동에 비중을 두었다. 교육에 있어서도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여 각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으며, 중등교육을 위하여 흥경현 왕청문(興京縣 旺淸門)에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유하현 삼원보에 동명중학교, 길림성 화전현 성내(城內)에 화성의숙(華成義塾), 유하현 왕청문에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의부의 이러한 교육활동은 중국군벌이 신교육령을 제정 반포하여 재만한인들에게 중국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경희는 이같은 정의부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하다, 1929년 1월 경 붙잡혀 같은 해 3월 22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假出獄關係書類(政府記錄保存所) 冊番 137卷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21面
- 東亞日報(1929.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