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황해도 (黃海道) 해주 (海州) 에서 3·1운동 (運動) 당시 자금을 지원하였다 하며 1920년 해주청년회 (海州靑年會) 에서 위원 (委員) 으로 활동 (活動) 하고 1920. 8월 대한독립단원 (大韓獨立團員) 들이 일제 (日帝) 주구인 은율군수 (殷栗郡守) 를 처단 할 때 자택 (自宅) 을 거사계획과 연락 및 단원들의 은신처로 제공하였고 1921. 6월 중국 (中國) 상해 (上海) 에서 극동 (極東) 올림픽대회가 끝난 후 열린 만국개방경기 (萬國開放競技) 에 여운홍 (呂運弘) 등과 선수로 출전하여 한 (韓) ·중·아 (俄) ·일 등의 선수 등과 어깨를 겨루며 한국 (韓國) 을 알리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 3월 서울에서 수양동우회 조직에 참가하고 1925. 2월 재정난 등으로 활동이 어렵게 된 우리 독립운동자간의 갈등으로 상처를 입은 뒤 30세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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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단(處斷) :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황해도 해주(海州) 사람이다.
해주 지방의 젊은 유지로 1919년 3·1운동 때 운동자금을 지원하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 출옥 후 재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동년 9월 10일 신천군(信川郡) 초리면(草里面)에서 군중들을 운집시켰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에 의해 5명이 사살되고 그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1920년 4월 7일 해주청년회(海州靑年會)가 창립될 때 창립위원으로 선임되어 청년회 활동에 참가하였던 그는 1920년 8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단원들이 일제 주구인 은율군수(殷栗郡守)를 처단할 때, 자택을 독립단원들의 거사 계획과 연락 및 단원들의 은신처로 제공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1년 6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만국개방경기(萬國開放競技)가 개최되자, 여운홍(呂運弘)·임원근(林元根) 등 7명과 함께 조선대표 선수로 출전하여 한국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의 의지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한국인들은 극동 국가들에 의해 치러지는 극동대회에 선수를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거부와 탄압으로 인하여 만국개방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다.
1922년 12월에는 서울에서 이광수(李光洙) 등과 함께 수양동우회 조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4면
- 조선청년운동사(선우기성, 1976) 410·411면
-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82) 245면
-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1983) 19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700면
- 독립신문(1921. 5. 31)
- 동아일보(1921. 7. 20, 7. 21, 8. 10, 8. 12)
- 조선합병10년사(조선출판협회, 1923) 589∼602면
- 3·1독립운동실록(3·1동지회, 1985) 하권 292∼29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2집 1287·14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