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노공일은 경상남도 창녕(昌寧) 출신이다.
을미의병운동 때에 진주(晋州)성을 점령하여 의진의 명성을 떨친 바 있던 신암 노응규(愼庵 盧應奎)의 족손(族孫)이며 제자이었다. 따라서 노응규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정신과 항일투쟁 경력을 흠모하고 있었다.
1906년 가을, 노응규가 충청·경상·전라 3도의 분기점이며 산중 요지인 황간군(黃澗郡, 현 永同郡)의 상촌면 직평(上村面 稷坪, 피뜰)으로 들어가 동지를 규합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이때 형성된 의진의 부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 장 노응규(盧應奎) 선봉장 엄해윤(嚴海潤)
중군장 서은구(徐殷九) 종사관 노공일(盧公一)
이들은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맹훈련을 하였다.
인근의 주민들 역시 감심하여 무기의 제조·운반·식량 제공 등 적극 협력하였다.
병력이 증강되어 감에 따라 일부 군사들을 파견하여 경부철도 등 군용시설을 파괴하고 일본군의 척후병을 섬멸하며 각 의진과도 연락하여 가면서 대진격을 준비하였다.
1907년 1월 21일 충청북도 경무서 황간군 분파소 순검들의 간사한 계교에 걸려 노응규 이하 서은구·엄해윤·노공일 등 주요간부를 비롯하여 김보운(金 雲)·오자홍(吳自弘) 등 6명이 순검 이연직(李淵直) 등에게 체포되고 부득이 의진도 해산되었다. 이때 노공일은 노응규의 명에 따라 제조한 화약을 이 유(李 有)에게 전달하러 가던 도중에 체포된 것이다.
한성 경무서에 투옥되어 옥중투쟁하다가 재판 받기 전 2월에 노응규는 옥사하고 노공일과 서은구·엄해윤은 1907년 5월 18일 평리원에서 각기 유형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3명은 7월에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백령도를 탈출하여 승복을 입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황성신문 1907. 2. 4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94·39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424·4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