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밤부터 3월 19일에 걸쳐 전개된 의성군 안평면(安平面) 대사동(大司洞)의 만세운동을 이종출(李鍾出) 등 대사동교회 인사들과 함께 주도하였다.
안평면 대사동의 만세운동은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박상동(朴尙東)이 3월 8일 대구 학생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그 사실을 대사동 교회에 알리면서 구체화되었다.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은 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이같은 사실을 접하면서 교회 인사들과 함께 일요일인 3월 15일에 거사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배세태는 이종출·김옥돈(金玉頓)·이양준(李良俊)·이북술(李北述) 등과 함께 3월 15일 낮 예배를 마친 후 시민 1백여 명을 규합하여 동일 오후 7시경 대사동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밤이 늦도록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자진 해산한 이들은 다음날 3월 16일 밤에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대사동을 출발한 1백여 명의 시위대가 기도동(箕道洞)을 걸쳐 창길동(倉吉洞)까지 행진하였으며, 이어 3월 17일에도 같은 시각인 오후 8시에 1백 50여 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화령동(花寧洞)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3월 18일에는 3백여 명의 시민들과 더불어 안평면의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시위하였다. 배세태 등의 시민들은 이렇듯 4일 동안 주로 밤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자진 해산하였으나, 3월 19일에는 낮부터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급기야 4백여 명의 시위대가 안평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한편 이웃의 도리원(桃李院)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확산시켜 갔다.
이에 일제는 의성경찰서의 경찰 병력을 동원하면서 대대적으로 탄압함으로써, 배세태는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3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