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1933년 8월 제주도 애월면(涯月面) 하귀리(下貴里)에서 강문일(康文一) 등과 함께 야학(夜學)을 운영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일본에서 전기제작공장에 근무하던 중 동향 출신 김귀영(金貴榮)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게 되었고,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실천 방침으로써 무산아동들에게 항일의식을 주입하기로 강문일과 뜻을 모으고 귀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33년 8월에 고향인 하귀리에서 야학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시켜 갔다. 또한 1934년 12월에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고자 이웃 마을에서 김홍규(金弘奎)·김을봉(金乙鳳) 등이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하면서 야학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통합 후 그는 60여 명의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전파하면서, 식민지 수탈에 의한 한국인의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달성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를 조직적으로 결집시키기는 방편으로 이천만가(二千萬歌)·혁명가(革命歌)·단결가(團結歌) 등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는 이 일로 1935년 가을에 붙잡혀 약 8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6. 6. 25 대구복심법원)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형사사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