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평남 평원(平原)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3월 9일 영유읍(永柔邑) 천도교구가 중심이 되어 어파역전(漁波驛前) 광장에서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고, 11일에는 평원군 공덕면(公德面) 퇴남리(退南里) 장날을 이용하여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경의 체포망을 각지를 피하여 전전하다가 같은 해 10월 중국 동삼성 환인현(桓仁縣)으로 망명한 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 뒤 1922년에는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여 민사부장(民事部長) 이웅해(李雄海)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1924년 봄 환서(桓西) 제팔구(第八區) 백가장(百家長)에 임명되어 민사부(民事部) 일을 맡으면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1925년 8월에는 통의부 제2중대 부관인 유광헐(劉光歇) 등과 같이 환인현 사강구(沙崗溝)에 살던 김리하(金利河)로부터 8백원(圓)을 모금하였고, 이듬해에는 수명의 동지와 함께 국내로 들어와 평원군(平原郡)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였다.
1927년 심양(瀋陽)으로 출장갔다가 일경에 붙잡혀 같은 해 12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8년 12월 1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29년 1월에 다시 환인현으로 망명, 국민부(國民府)에 참가하여 환인현 소학교 교원으로 임명되어 한인 자제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1935년 8월경 일군의 습격을 받고 항전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조선일보(1927. 12. 15, 12. 16)
- 매일신보(1927. 12. 16)
- 중외일보(1927.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