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6
3. 1927. 3. 24
이상 각항
- 사살(射殺) : 활이나 총 따위로 쏘아 죽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평북 사람이다.
15세때 보통학교(普通學校)에 들어갈 정도로 가산이 빈궁하였던 그는 재학 중이던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1920년 3월 학교를 졸업하고 면서기(面書記)로 일하고 있을 때 압록강 이북에서 군자금 모집차 들어온 독립군을 따라서 간도(間島)로 건너갔다.
그는 간도로 건너간 직후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가입하여 최재경(崔在京)·임일권(林日權) 등의 동지들과 군자금을 모집하는데 앞장을 섰다.
1925년경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위치해 있는 상해(上海)로 가서 1926년 1월 1일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라는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최병선(崔炳善)·고준택(高俊澤)·강창제(姜昌濟) 등과 함께 조직하였다.
1926년초, 그는 병인의용대의 조직 목적에 따라서 최병선·김광선(金光善) 등과 함께 상해 일본총영사관(日本總領事館)의 통역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독립운동가를 밀고하던 박제건(朴濟乾)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같은해 2월 1일 그를 비롯한 3인의 대원은 마침내 야채시장에서 박제건을 만나 도망치는 박제건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여 친일 주구를 처단하고 그곳을 순시하던 중국 순경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와 그를 체포하려 하자 급히 몸을 피하면서 권총을 발사하여 사살한 후 잠시 몸을 숨기면서 다음 거사로 상해의 일본영사관을 폭파하기로 계획하였다.
1926년 4월 8일 그와 동지들은 자동차를 타고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 황포탄로(黃浦灘路)에 있는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졌지만 벽돌담과 유리창만 파손되었을뿐, 완전 파괴에는 실패하였다.
또한 그와 최병선·김광선 등은 1926년 융희황제(순종)의 인산날(6월 10일)을 맞이하여 국내로 잠입해서 행사장에 모일 국내외의 고관들에 대한 암살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1926년 6월 1일 여객선 순천호(順天號)에 승선하여 조국을 향해 가던 중 불행히도 영국관헌에게 피검되고 말았다.
일본으로 압송된 그는 1927년 11월 30일 무기징역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연감 222·264면
- 기려수필 347∼349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131·413·415·620·726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6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577∼57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05·72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26·929·931면
- 동아일보(1926. 4. 30, 1927. 3. 13, 3. 26, 12. 2)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53·827·8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