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7. 8. 27 의병 300명을 인솔하고
3. 1907. 8. 31
4. 1907. 7~9
5. 1907. 9. 10
6. 1907. 9. 12 예천읍 공격,
7. 1907. 9. 16 의병 300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본관은 단양이며, 장재안(張載安)의 장남으로 경북 예천군(醴泉郡)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워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년 12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어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이르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국민들에게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고 친일반역행위를 엄단하겠다는 경고로써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후 1907년 4월에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침략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를 비롯한 매국적신들을 살해코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피신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서 재차 거의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이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장윤덕도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이강년대장 휘하에 합진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풍기(豊基), 봉화(奉化), 문경(聞慶), 용궁(龍宮), 예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7월 9일에는 일본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보조원(日補助員)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그해 8월 27일 의병 300여 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그 후 9월 3일 문경읍을 습격,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인의 가옥을 소각시켰으며, 10일에는 이강년, 민긍호(閔肯鎬)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경면 갈평리(葛坪里)에서 일경 영곡경시(永谷警視)와 삼원소위(三原少尉)가 인솔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적 3명과 한인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9월 12일, 예천읍을 습격하고 이어 16일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尙州邑)을 습격, 일경의 자위단(自衛團)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 중 대구수비대에서 전중(田中) 대위가 1개 중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은 무너지고 장윤덕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하며 항거하다가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咸昌面) 구향리(舊鄕里) 뒷산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84·58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7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