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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22년 8월
3. 1922년 12월 26일
4. 1925년 7월 3일
5.
(
- 피살(被殺) : 죽임을 당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와 동아일보 간도특파원으로 실종 순국한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과 형제간으로 끝의 동생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오동진(吳東振)·박태열(朴泰烈) 등과 같이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2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을 총망라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자 총영장 오동진의 막료로 임명되어 조병준(趙秉俊)·윤하진(尹河振)·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무장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8월에 미국의원단이 내한하는 기회를 타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고관암살의 밀명을 띠고 국내에 파견되었다.
제1대의 김영철(金榮哲)·김성택(金聖澤)·김최명(金最明) 등은 서울에, 제2대의 그와 박태열(朴泰烈)·문일민(文一民)·우덕선(禹德善)·김예진(金禮鎭)·안경신(安敬信) 등은 평양에, 제3대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은 선천(宣川)과 신의주 방면으로 진입하였다.
그는 제2대에 소속되어 1920년 8월 3일 평안남도경찰부 청사와 평양시청, 평양경찰서 등에 폭탄을 던졌으나, 평남경찰부만 일부 폭파하고 일경 2명을 폭사시켰으며, 나머지 폭탄은 불발에 그쳤다. 제2대원은 거사후 무사히 본대에 돌아왔으나 여성대원인 안경신(安敬信)만이 유일하게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궐석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본대로 돌아온 후 1920년 11월 11일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혁명자단체대표자회의'에 김규식(金奎植)·최창식(崔昌植)·이 웅(李雄)·여운형(呂運亨)·김시현(金始顯)·나용균(羅容均) 등과 함께 한국 각단체 대표중 1인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협력하였으며, 1922년 1월에는 그와 이 탁(李鐸)을 체포하려는 일경의 밀정이 파견되었다는 정보에 따라 임시정부에서는 윤덕보(尹德甫)에게 밀정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한다.
1922년 8월에 그는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 등 10명이 연서하여 국민대표회의주비회(籌備會)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하여 분열되는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23년 12월 26일에는 최천호(崔天浩)와 함께 상해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임명되어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의경대 고문인 김 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활동하였다.
1924년 3월 21일에는 상해의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발기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여 그 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종철(金鍾喆)·김문희(金文熙)와 같이 계속 활동하던 중 1924년 8월 26일 중국인에게 저격당하여 광자병원(廣慈病院)에서 별세하였으며, 동지들의 애도속에 상해 갑북황가남묘(閘北黃家楠廟)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서울현충원 위패 봉안)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년감 170·184·19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12·472면
- 기려수필 292·293·294면
- 동아일보(1921. 5. 2, 10. 20, 1922. 3. 8, 4. 10)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68·274·275·6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208·211·212·216·217·218·21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4·260·302·399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99·504·5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22·326·328·329·33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569·57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