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충청남도 공주(公州) 출신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한반도 식민지화 작전을 적극 추진하여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로 늑결시켰다. 이에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이상구는 홍주의진에 참여하였다.
당시 홍주는 호서 의진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차 홍주 의거에서 김복한(金福漢)·안병찬(安炳瓚) 등이 활약하였으나 1906년 봄에 적에게 크게 패하고 지도층 인사들이 구금 당하게 되었다.
이때 일찍이 김복한·안병찬 등과 접촉을 가진바 있던 민종식(閔宗植)이 일부 척신들과의 제휴에 실패하고 2차 홍주 의거를 계획하여 5월 11일(음 4월 18일) 홍산(鴻山)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다. 이때 이상구는 문석환(文奭煥)과 더불어 중사(從事)로서 종군하였다.
이들은 서천(舒川)을 경유하여 남포(藍浦)로 들어가 자리잡고 인근의 의사들을 불러 모아 병력을 보강하였다. 5월 19일 홍주로 진격하여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적군을 격파하고 얼마 후에 입성할 수 있었다. 홍주성을 장악한 의진은 부서를 재편성 강화하고 이상구는 좌익장(左翼將)에 임명되었다.
의진은 성을 파수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으나 일단 물러났던 적군은 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적극 공세를 전개하였다.
드디어 5월 31일 적의 대공세로 성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이상구는 비롯한 83명의 의병이 경성으로 압송되어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6월에 70여 명이 석방되었으나, 이상구를 비롯하여 남규진·유준근·이 식·신현두·문석환·신보균·최상집·안항식 등 9명은 일본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이는 그가 취조 받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적을 꾸짖으며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대마도에 유배되고, 뒤미처서 최익현과 임병찬이 유배되어 왔다. 최익현을 필두로 한 이들은 서로 경전을 공부하고 시를 지으며 망향의 정을 달래었으며 1906년 11월 최익현이 운명할 때까지 그의 침식과 병구완에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5·356·35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3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156·299·317·327·329·3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