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함북 경성(鏡城) 사람이다.
산포수 출신으로 의병(義兵)에 참여하였다가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 8월 가족을 이끌고 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는 진단산 진학신(秦檀山 溱學新)과 함께 의병출신으로 구성된 의군단(義軍團, 일명 : 義軍山砲隊)로서 임시정부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의군단은 산포수와 의병출신의 정예부대로서 1920년 초에 간도국민회에서 12개의 무장독립단체를 통합하기 위하여 의군단을 합류시키려 하였으나, 의병출신의 이질적인 인적구성으로 인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 등이 연길현 명월구(延吉縣明月溝)에서 전의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통신부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0년 일제의 세력이 간도국민회에서 12개의 무장독립단체를 통합하기 위하여 의군단을 합류시키려 하였으나, 의병출신의 이질적인 인적구성으로 인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진학신과 함께 의군부를 지휘하여 이 회의에 참석하고 연합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회의 결과 청산리독립전쟁에 있어서의 작전구역을 분담하게 되었는데 북로군정서는 송림평(松林坪)을, 대한독립군은 두도구(頭道溝)를 , 의군부는 버들고개(柳嶺 : 함경북도 무산쪽)를 각각 분담하게 되었다.
그가 거느리는 의군단은 의군부와 유기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명확한 지휘계통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이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전대미문의 통쾌한 전승을 거두고 독립군의 실력을 과시하였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청산리독립전쟁 이후에는 소·만 국경지대에서 조직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 합류하여 노령으로 들어갔다가 1921년 10월에 추풍(秋豊)으로부터 부하 17명을 거느리고 연길현 국자가 수남궁(延吉縣局子街水南宮)지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제의하기 위하여 전(前)의군단 서(西)지방부장이던 이범모(李範模, 李稷 또는 李直)를 방문하여 협의하였다.
이후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吉林省寧安縣寧古塔)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3년에는 동녕현(東寧縣)일대에서 총군부(總軍府), 광복단(光復團)·태극단(太極團)·공교회(孔敎會), 그리고 그가 지휘하는 의군부(義軍府)의 여력이 남아있어 분산활동을 하였으나 그 세력이 극히 미약하였으며, 이후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일제가 만주를 완전히 장악한 1932년경에도 그가 영고탑에 거주하기는 하였으나 생활이 극도로 곤란하였으며,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39·340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72·76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81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15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11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06·308·33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105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39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