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빈에서 독립당원 (獨立黨員) 으로 일 경대 (日警隊) 및 중국국경대 (中國國警隊) 와 교전 (交戰) 하여 합이빈 (哈爾濱) 일본총영사 (日本總領事) 국길정보 (國吉精保) , 송본 (松本) 형사대 (刑事隊) 부장 (部長) 등 10여명 (餘名) 을 총살 (銃殺) 하고 3명 (名) 의 독립당원 (獨立黨員) 이 현장 (現場) 에서 피살 (被殺) 순국 (殉國) 함. (당시 (當時) 군정서원 (軍政署員) ) 조선인 묘지 (朝鮮人墓地) 에 안장 (安葬)
[석주유고 (石洲遺稿) 권2 (卷二) p.123∼5]
[항일순국의열사전 (抗日殉國義烈士傳) p.295]
[동아일보 (東亞日報) 1924. 4. 13]
[한국독립운동사 (韓國獨立運動史) p.298]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
[
[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1920년 봉천성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직된 흥업단(興業團)에 가담하여 항일무장 활동을 하였다.
1924년 봄 하얼빈(哈爾濱) 일총영사관 순사부장 국길정보(國吉精保)와 형사부장 송도(松島) 등이 독립투사들을 함부로 해친다는 정보를 듣고 이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서로군정서원(西路軍政署員)인 김만수(金萬秀)·최병호(崔炳鎬) 등과 협조하였다. 그러나 동년 4월 6일 하얼빈 18도가 평강리(18道平康里)의 중국여관 동발잔(同發棧)에서 계획을 숙의중 일경에 탐지되어 포위당했다. 그날밤 12시에 일경 10여명을 거느리고 습격하던 국길(國吉)은 현장에서 사살되었으며, 동 여관이 벽돌집으로 이들을 쉽사리 체포할 수 없게 된 일경은 8일 오후까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중국측에 강권하여 중국군 2백여명의 증원을 받아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일본인의 앞에 항복하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절대 불응하였다.일경은 동일 오후 1시경에 폭탄 10여개를 투척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260발의 탄환을 퍼부어 잔인하게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그를 비롯한 동지 3명은 현장에서 무참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9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8·344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4권 127면
- 동아일보(1924. 4. 13)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46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5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36면
- 석주유고 3권 123·124·1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