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함경남도 함흥(咸興) 사람이다.그는 1918년 함흥고등학교, 함흥농업학교, 영생중학교 등의 3·4학년 학생과 함께 함산학우회를 조직하여 은밀히 항일 투쟁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던 중, 1919년 2월 28일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고 시위를 구체적으로 계획하여, 3월 3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3월 2일, 동계획과는 관련없이 군중이 산발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3백여명이 붙잡혔고, 일제는 3일 새벽 함흥 관내에 예비검속을 단행하여 함산학우회 간부들은 대다수가 붙잡혔다. 이때 피신한 그는 박상보(朴相甫)와 함께 ≪독립신문≫을 제작하여 독립운동의 소식을 신속히 전달하기 위하여 배포책임을 맡아 활동하던 중 결국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평양(平壤)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20년 9월 17일 만기 출옥한 그는, 1921년 4월 신흥우(申興友)·장덕수(張德秀) 등 76명과 함께 조선교육조사위원회(朝鮮敎育調査委員會)를 발기하여, 조선민족의 진가를 발휘하여 인류공존의 대의를 펼 것을 목적으로, 각종 교육사업에 관한 실태를 조사하였다.1923년 8월에는 함남도민대회 집행위원이 되어, 그 대회에서 「대중의 성(大衆의 聲)」, 「생의 충동(生의 衝動)」이란 연재로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1925년에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상임위원 및 함남도민대회 집행위원·전조선노동총동맹 창립준비요원 등을 역임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며, 1926년 2월 10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0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86·691·916·994·998·1004·1005·1012면
- 동아일보(1921. 4. 11, 1923. 8. 29, 1929. 2. 16)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118·488·55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