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7. 9. 6 왜병 20명과
3. 1907. 10. 5
4. 1907. 12. 30 이외에
5. 1908. 1. 3 의병대장으로 의병을 인솔하고
6. 1908. 2. 24
(
7. 1908. 3. 12
8. 1908. 3. 15 3월 2일
9. 1908. 5. 1
10. 1918. 12. 26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본은 상산(商山)이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의 문인으로서 전라남도 영광 출신이다. 1907년 8월 8일 한문 수학(漢文修學)하던 중에 구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과 함께 비밀히 국사를 도모하여 무기를 운반하여 두었다가 일이 누설되어 성공하지 못하고 수련산(秀蓮山)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모든 의사들을 모아 놓고 피를 뿌리며 단에 올라 천지에 맹서하고 호남 창의 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였다. 성재가 대장에 추대되고, 통령(統領)에 김용구가 임명되었다. 그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다. 참 모 김엽중(金燁中) 후 군 이남규(李南奎) 김봉수(金鳳樹) 운 량 김태수(金泰洙) 종 사 김익중(金翼中) 총 독 백효인(白孝仁) 서석구(徐錫球) 감기(監器) 이영화(李英華) 전수용(全垂鏞) 좌 익 김창복(金昌馥) 이석용(李錫庸) 우 익 허경화(許景和) 선 봉 김 준(金 準) 포 대 김기순(金基淳) 중 군 이철형(李哲衡) 이들 중 상당한 수의 인물이 후에 개별 의진을 구성하여 호남 의병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호남 창의 회맹소의 역사적 의의는 적지 않다고 하겠다. 이들은 격서문(檄書文)을 작성하여 각 지방으로 돌려서 의병운동에 동참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을 것을 전하였다. 격서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임금은 어디 있는가. 28대의 현성(賢聖)이 서로 계승하였으며, 본국이 비록 쇠하였다 하나 3천여 리의 산천이 고쳐지지 않았네. 대신의 직을 맡은 자는 적의 앞잡이 노릇하는 자 아님이 없고, 머리 깎고 얄궂은 말을 하는 놈은 모두 왜놈의 창자를 가진 자들이다. 비록 천벌에는 오랫동안 빠졌으나 어찌 잠깐인들 사람의 베임에서 벗어나랴." 하였다. 8월 11일 동지 박용근(朴溶根)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자 수백 인의 자원병이 그를 따랐다. 그날 밤으로 그들을 무장시켜 가지고 다음날 영광읍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적병과 접전하였으나 불행히 병기가 좋지 못하여 적에게 패하였다. 그 후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여러 곳으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를 찾아다녔는데, 담양(潭陽)으로 가서 고녹천(高鹿川)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어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에 가서 탐문한즉 그가 지리산 상봉 토굴사(土窟寺)에 있다 하므로 곧 석벽과 밀림을 헤치고 찾아 뵙고 토적 구국의 방략을 의논하고 행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8월 26일 화개시(花開市)에서 왜적 10여 명을 포살하였고, 이튿날 다시 칠불사(七佛寺)에서 적 수 명을 포살하였다. 9월 6일에는 연곡촌(連谷村)에서 적병 10여 명을 포살하니 나머지 적병은 모두 도망하였다. 9월 16일 문수사(文殊寺)에서 적 10여 명을 사상시켰고, 9월 25일 무장(茂長)읍내에서 적병을 무찌르니 적은 모두 놀라 도망하였다. 9월 26일 고창(高敞) 읍내에서 2차에 걸쳐 적과 접전하여 30여 명을 사살하였다. 11월 3일 법성포(法聖浦)에서 적 10여 명을 살해하고 왜적이 살던 집을 방화하였으나 그들의 재화(財貨)는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11월 5일 장성(長城) 오동촌(梧桐村)에서 적병 20여 명을 포살하였고, 11월 7일 백양사(白羊寺)에서 30여 명의 적을 살해하니 적이 물러갔다. 11월 19일 함평(咸平) 선치(蟬峙)에서 적 10여 명을 살해하였다. 12월 2일 내원리(內院里)에서 적 15, 6명을 포살하였고, 13일 고부 인촌리(仁村里)에서 적병 40명을 사살하니 적이 물러갔다. 15일 죽림리(竹林里)에서 적 15, 6명을 포살하였고, 27일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적 1백 여명을 포살시켰으나, 아군의 사망자 또한 30여 명이나 되었다. 12월 28일 행군하여 순창(淳昌) 복흥면(福興面 社倉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성재 기삼연과 서로 동서로 나뉘었다. 성재는 발을 다친 까닭에 걷기가 불편하여 더 이상 종군할 수 없었다. 성재는 김용구에게 후임을 맡기면서 "나는 지금 발을 상해서 종군하지 못하겠으니 군중의 제반 일을 그대가 모두 맡아서 신중히 처리하여 끝을 마치어 국가의 원수를 갚도록 하라." 하고 인(印)과 칼을 맡겼다. 김용구는 군병(軍兵)을 대신 거느리고 행군하여 장성 조양리(朝陽里)로 갔다. 한편 기삼연은 순창 흥복산(興福山) 속에 사는 재종제인 구연(九衍)의 집에서 치료하면서 재기를 꾀하고 있었으나 음력 정월 초하루에 적의 포위를 받아 결국 체포당하여 음력 1월 2일 광주시 서천교(西川橋)에서 적의 흉탄에 해침을 당하고 순국하였다. 그 후 김용구의 의진은 성재의 중군장이었던 김태원·김 율 등과 연합 의진을 구성하기도 하면서 적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1908년에 들어가면서 적의 공격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塔丁里)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반나절을 항전하여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2월 19일 고창 읍내에서 세무주사 서상달을 포살하였으며, 이튿날 장성 토정리(土井里)에서 적병 50여 명을 포살시켰다. 2월 24일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 10여 명을 사살했고, 3월 2일 영광 오동리(梧桐里)에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나머지 적은 도망하였다. 3월 12일 구수산에서 적의 마병(馬兵) 10여 명 보합(步合) 20여 명을 사살하였다. 3월 23일 영광 홍농면 대덕리에서 적과 접전하여 수명을 사살하였으며, 28일 무장 상리면 마래촌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4월 11일 무장 선운사(禪雲寺)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 명을 포살시켰으며, 17일 무장 와공면 유동(儒洞)에서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게 패하였고 김용구는 부상을 당하여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김용구는 군권을 박도경(道京)에게 맡기고 장성 백암산중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3, 4년을 숨어서 치병하는 가운데 병은 좀 나았으나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경술국치를 당하자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후사를 도모할 목적으로 보다 깊은 산중인 금산(錦山)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울분과 노병이 첨극(添劇)한데다가 고종(高宗)이 승하하였다는 변고를 듣고 음독하여 1918년 12월 21일(음력) 절사(節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81·20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11·612·651·685·6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14·615·61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57·741·77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7·8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