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황해도 은율(殷栗)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의 장연(長連) 장날을 이용하여, 유원식(柳元植)·임국승(林國承)·오윤화(吳允和)·최태영(崔泰永)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각 교회의 신도와 청년·학생들과 연락을 하며 시위계획을 세우고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놓았다.
이때 김일영(金一泳) 등 10여명의 학생들도 비밀회의를 갖고 대한독립만세라는 문구를 적은 태극기를 그려서 장터·보통학교 정문 게시판 등에 붙여서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3월 12일 장연 장터에는, 장연면은 물론 일도면(一道面)·이도면(二道面)에서도 기독교인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평창(平昌)군수를 지낸 적도 있는 유력한 가정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영향력이 컸으며, 또 그의 형이 일제의 앞잡이로 경찰의 요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궐기하여 시위군중을 지휘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거사계획을 미리 알고 대비하던 일본 경찰은, 인근 송화읍(松禾邑) 헌병대에 응원 요청을 하여 시위대열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분노한 시위군중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까지도 파괴하였다.
그후 그는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되어 수년간의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에는 조만식의 추천으로 오산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과 임정의 군자금 모집 등 구국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황해도지(1981) 267면
- 은율군지 192·33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304·3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