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 1920년 다시 입국하여
4. 그길로
5. 1926년 3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남 대동(大同)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에 가입하였으며, 1920년 3월에 다시 입국하여 군자금 모집차 평남 각 군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평양에서는 3·1독립운동 1주년 기념으로 격문을 작성하여 시내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기영(李起榮)·한준관(韓俊觀) 등과 항일구국군을 조직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0년 7월에는 장혜근(張惠根)·장인갑(張仁甲) 등과 상의하고 8월 3일 오후 9시경 동지들을 3대로 나누어 평안남도 제3부·평양경찰서·평양부청에 푹탄을 투척하려 하였으나 경찰서와 부청은 실패하고 제3부 청사만 성공하였다. 피신도중 평양 칠성문(七星門) 밖에서 경계중인 순사를 저격하여 부상시키기도 하였다.
그해 8월에는 미국의원단 입경을 앞두고 소속해있던 대한독립단 평남지단에 속해있던 그는 지식개발·한국독립운동달성 등을 목적으로 동지 20여명과 대한일신(日新)청년단 결사대를 조직하고 장덕진(張德鎭)·안경신(安敬信) 등 1단과 연락하여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지는 등 과감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상해 불란서 조계(租界)로 피신하여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이 운영하는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직원으로 근무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임시정부내무차장 나창헌(羅昌憲)을 단장으로 하는 정위단(正衛團)을 조직하여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심판원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5년 12월 여운형(呂運亨) 구타사건 등이 일어나자 보다 강력한 활동을 하기 위하여 1926년 1월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고 그 대원이 되어 교포사회를 보호하기도 하였다.
1926년 3월에 상해(上海)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동월 15일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어 15년형을 구형받았으나 평남도청 폭파는 증거불충분으로 면소되어 2년형이 확정됨으로써 1928년 12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고의 여독으로 평생을 고생하였으며 6.25당시 북한군에게 사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8·21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147·626·634·646·943면
- 기려수필 291·292·29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995·996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57면
- 동아일보(1921. 10. 4, 10. 8, 1927. 12. 22, 1928. 12. 4)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0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68·493·494·515·517·952·960면
- 한국민독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21·562·59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466·561·606·6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4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