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07 이범윤 (李範允) 안중근 (安重根) 등과 의병 (義兵) 을 모아 기의 (起義)
2. 1911 105인 (人) 사건 (事件) 에 황해도 (黃海道) 주도자 (主導者) 로 피체 초심 (初審) 에서 종신형 (終身刑) , 복심에서 10년 징역 언도 (言渡) 사령 (赦令) 에 의 (依) 하여 6년 감형 (減刑) , 옥중 (獄中) 생활 (生活)
3. 1920김구 (金九) 등에게 자금을 제공하였다는 죄로 4년간 (年間) 복역 (服役)
4. 1926 60만세 사건 (萬歲事件) 때 진두지휘를 하다가 돈화문 앞에서 체포되어 1929년 2월에 출옥 (出獄) 하였으나 고문으로 득병 (得病) 하여 1929년 5월 별세 (別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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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11 105
3. 1920
4. 1926 60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태어났다.
1907년 4월에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이 1908년에 노령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부대를 조직할 때 이에 참가하였다.
신민회의 무관학교(武官學校) 설립과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저지하고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제가 소위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을 조작하여 전국의 신민회 회원들을 일거에 검거할 때 신효범도 1911년 2월에 체포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공판투쟁을 완강히 전개한 결과 공소심에서 1913년 3월 20일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고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3 1운동 후 1920년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제공했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1926년 서울에서 6 10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돈화문 앞에서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7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5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2권 6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62 29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67 67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50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2권 8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760 8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