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함남 정평(定平) 사람이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1928년경 일본에 유학하였으나 곧 귀국하여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이현직(李鉉稷)·한병락(韓炳洛)·원회극(元會極) 등과 함께 청년운동을 주도하여 정평청년동맹(定平靑年同盟)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927년 2월 농사개량, 상호부조, 경제적 복리증진을 표방하고 농민단체 정평농우회(定平農友會)를 결성하였다.
동회는 1928년 2월 제4회 정기대회에서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정평농민동맹(定平農民同盟)으로 개칭하고 조선무산대중의 정치적·경제적 이익획득과 문맹퇴치·의식고양 등의 강령을 설정하여 최고소작료 제정 등 농민들의 권익쟁취를 위해 힘썼다.
1930년 3월 정평농민동맹 제3회 정기대회에서는 1,300여명의 조합원이 지부간 사장과 반장의 지휘 아래 대열을 편성하여 혁명가와 일제타도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폈다.
이일로 인하여 동 동맹의 모든 집회가 금지당하자 동년 6월 서면대회를 통해 정평농민조합(定平農民組合)으로 개칭하면서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혁명적 농민조합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갔다. 그는 동 조합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정평농민조합은 종래의 정평청년동맹·정평여성동우회·신상여성동맹(新上女性同盟)을 흡수하여 청년부·부인부·소년부의 3부와 군내 9개면에 지부를 설치하여 지부 단위로 활동하였으며 133개의 리(里)에 반(班)조직을 결성하였다.
또한 농민들의 당면이익과 직결되는 26개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59개소의 야학을 설치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각종 기념일에는 강연회, 항일유인물 배포, 시위운동 등을 폈다.
그는 1930년 8월 '전조선노동농민에 격함'이란 격문 200여매를 작성 배포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169명의 조합원이 일경에 붙잡혀 그는 1933년 1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3. 12. 9 경성복심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48·254면
- 동아일보(1934. 9. 14)
- 사상월보 3권 10호 13∼24면
- 조선일보(1931. 1. 30, 2. 5, 1932. 11. 30, 12. 1, 1933. 4. 26, 10. 26, 12. 15, 1934. 6. 24, 1936.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