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남 담양(潭陽) 출신으로 본은 고흥이다.
임진왜란 때 금산 7백의사(錦山七百義士)의 지도자로 알려진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의 후손이며, 을미호남의병장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의 동생으로서 그의 아들 재춘(在春)은 후사 없이 돌아간 녹천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항일 투쟁으로 유서 깊은 그의 일문은 고광순을 비롯하여 인봉 고제량(麟峰 高濟亮) 고광수(光秀 光德)·고광채(光彩) 등이 그와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고광훈은 을미조약을 계기로 일어나서 군대해산 이후까지 의병운동을 전개한 형 녹천의 의진에 투신하였다.
1907년 1월 24일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고광순을 의병장으로, 고제량을 부장으로 초대하고, 고광훈을 비롯하여 고광수·고광채·윤영기(尹泳淇)·박기덕(朴基德) 등이 참모가 되어 각기 부서를 맡아서 토적격왜(討賊擊倭)의 전술 전략을 계획하였다. 이어서 이들 녹천 의진은 각지의 의사들에게 연락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였다.
이때 남원(南原)의 양한규(梁漢奎)로부터 남원합동작전을 전개하자는 제의를 받고 2월에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양한규 의진이 적에 의하여 궤멸 당하였기 때문에 일시 남원성 포위전을 전개하였으나 곧 퇴각하였다.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병력을 증강하던 중 능주(綾州, 오늘날의 和順) 사림(士林)의 협력을 얻어 1907년 4월 25일(음 3월 13일) 윤영기와 함께 화순으로 진격하여 점령하고 적 거주민들의 가옥을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4월 26일 다시 동복(同福)으로 진군하였으나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접전하다가 크게 패하고 군사들이 일시 흩어졌다.
8월경부터 창평 제심리(昌平 齊心里)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거사 계획을 세우고, 9월 11일(음 8월 4일)다시 형 녹천을 도독(都督)으로, 박성덕(朴聖德)·고제량(高濟亮)을 도총(都總) 및 선봉으로, 신덕균(申德均)·윤영기(尹永淇) 등을 참모로 정하고 9월 12일부터 행군을 시작하였다.
곡성군 구룡산(谷城郡 九徿山)에 이르렀을 때 참모 신덕균의 제의로 일본인이 많기로 알려진 동복읍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9월 14일 새벽 동복읍을 점령하고 적들을 궤산시켰다.
9월 17일(음 8월 10일) 녹천 의진은 다시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으로 들어가 유진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는데, 인근 일대에서 많은 의사들이 자원하여 와서 군사의 수가 1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월 17일(음 9월 11일) 적의 내습을 받았다. 이들은 군사 10여 명만을 남겨 두고 전 군대를 2대로 나누어 대전케 하였으나 설상가상으로 왜병이 하동(河東)으로부터 또 쳐들어왔다. 모두 분전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녹천과 고제량이 전사하고, 고광훈은 체포되어 3년간 진도(珍島)로 유배(流配)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01 402 40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35 636 6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81 28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