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부터 봉오동전투에서
- 일군(日軍) : 일제 군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함북 온성(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간도 왕청현(汪淸縣) 백초구(百草溝)에 망명한 후 주민 수천명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한편, 감리교인 10여명과 함께 신민단(新民團)을 조직, 석현지부(石峴支部) 군사령관에 임명되어 무장군 500여명을 양성하였다.
동년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여 간도 및 함경북도 지방에서 모금한 군자금 3,500원으로 노령에서 권총 20정, 소총 30정, 탄환 등을 구입하여 독립군의 무장에 만전을 기하였다.
동년 12월에는 해삼위(海蔘威)에서 소련군 린쉬비크파 군사령관 셉첸코 및 김규만(金奎晩)과 밀약하여 노령에서 소총 500정, 탄환 10만발을 무상으로 공급받아 신민단군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1920년 3월경에는 부하 20명을 인솔하고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나남(羅南) 19사단 아스가와부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300여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명월구(明月溝) 이청림(李靑林)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0년 10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정근(安定根)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단체를 통합하여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를 설립하였는데 그는 김창순(金昌順)과 함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표로 참석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날이 팽창되어 가는 일군의 세력을 감당할 수 없어 1922년에는 노령(露領) '고로시카'로 망명하여 젊은 교민들의 교육에 진력하였다 한다.
1935년에는 일본 자작농 토벌대의 선두에 섰다가 붙들려 모진 고문에 고막을 잃기도 하였으며 탈옥한 후 다시 투쟁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11·31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상권 406∼40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8·154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82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116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42·669·67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5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