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515
성명
한자 金奎喆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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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07. 6. 단양(丹陽) 죽령(竹嶺) 청풍(淸風) 제천(堤川) 등지에서 기병하여 의병대장으로 활동한 이후 1909~1910 사이에는 고종황제(高宗皇帝)친서(親書)봉지(奉持)하여 출발 도중(出發途中) 발각(發覺)되었으나 의친왕(義親王)을 모시고 망명 도중(亡命途中) 발각되었고 1922. 3. 군자금(軍資金)소지(所持)하고 상해로 가다가 인천에서 발각되어 5년간 옥고를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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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김규철은 충청북도 단양(丹陽) 출신이다. 1907년 8월 1일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일찍이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낸바 있던 김규철은 단양을 근거지로 삼아 이명상(李明相)과 더불어 의거를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처음에는 의진이 5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이윽고 수천 명을 소모할 수 있었다. 그는 몸 움직임이 날렵하여 세칭 비장(飛將)이라 불렸다. 대체로 단양 청풍(淸風) 충주(忠州)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9월 죽령(竹嶺) 지역에서 4백여 명을 인솔하고 적과 전투를 전개하여 5차례의 전투를 승전(勝戰)으로 이끌었고 단 한 번 패전하였을 뿐으로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후 왜경(倭警)에게 체포당하여 대구감방에서 수감되었다가 요행히 탈출할 수 있었다. 1909년 고종(高宗)이 원세개(袁世凱)에게 보내는 청병서(請兵書)를 가지고 가다가 인천(仁川)에서 다시 체포당하였다. 이 일로 김규철은 6개월형을 받았다. 1919년 이범규(李範圭) 남장희(南壯熙)와 합세하여 의친왕(義親王)을 모시고 중국으로 망명하던 도중 안동(安東)에서 발각 당하여 실패하였다. 1922년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전하기 위하여 상해(上海)로 가던 도중 인천(仁川)에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이강년의 '창의 일록'을 간행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시종 몸을 아끼지 않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3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3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30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규철 - 충청북도 청풍 -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북도 제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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