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충청남도 청양(靑陽) 출신이다.
1906년 3월에 의병을 일으켜 홍주(洪州:지금의 홍성)에서 거의(擧義)한 의병대장 민종식(閔宗植) 의병진에 들어가서 참모사(參謀士)로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에 홍주성을 공격하였을 때 전열(戰列)에 참가하여 여러 의병들에게 정신적으로 강한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그러나 이 홍주전투 도중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交戰)하다 함께 체포된 90여 명의 의병들과 서울에 있는 일군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일본 대마도(對馬島)로 끌려갔다.
그리하여 의병장(義兵將)인 최익현(崔益鉉)보다도 한달 먼저 대마도로 압송되었던 소위 9의사(九義士)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 곳에서 억류되어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일본인들에게 굴하지 않고 의거(義擧)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대마도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인 1907년 즈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뒤 1912년 9월에 재차 의거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임병찬(林炳瓚)으로부터 고종황제가 친히 내린 밀조(密詔)를 전달하라는 임무를 하명(下命)받고 이 명령을 무사히 수행하니 이를 계기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조직에 공헌한 바 크다. 독립의군부는 1912년 9월 28일(음력) 고종황제의 밀조를 받아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에 임명된 임병찬이 조직하였다.
그런 후 널리 격문을 전달하여 동지를 불러모으는 등 그 조직을 호남지방으로 확대시켰다. 이어 1913년 9월에 서울로 올라온 임병찬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더불어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켰다.
독립의군부는 일제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여 한국통치를 곤란케 하는 한편 외국에 대해서도 한국인이 일본의 통치에 열복(悅服)하지 않는다는 점을 표명하고 더불어 국민 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진작시켜 일시에 일제를 몰아내려는 대규모의 의병운동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14년 5월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검거 당하였다. 이 식 역시 이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에는 전국 각지를 유리 방랑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사망하였다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109면
- 고등경찰요사 177∼17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3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