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수호조약 (修好條約) 에 결사반대한 면암 선생 (勉庵先生) 의 뜻을 받들어 척화대의하며 우승지직 (右承旨職) 을 사직함과 거의 항쟁 (擧義抗爭) 을 결심하고 최익현 (崔益鉉) 선생의 의병 (義兵) 제1수모 (首謀) 로서 준비작업에 1년간 활약하였으며 1905~1907 경기 (京畿) 미김 (渼金) 에서 의병 300여명 기병 (起兵) 하여 양주 (楊州) , 광주 (廣州) 등지에서 교전 함
1907년 3월면암 (勉庵) 의 지시에 따라 청국 (淸國) 에 건너가 원세개 (袁世凱) 등과 만나 구국방안을 호소하였고 고종 (高宗) 퇴위 후 다시 청 (淸) 에 입국하여 왜축출을 협의하였으며 도만 (渡滿) 하여 내외 동지 (內外同志) 들과 광복운동을 획책 1910년 귀국즉시 왜경 (倭警) 에게 강제구금 4월만에 융희 황제 (隆熙皇帝) 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구국 기도 (救國企圖) 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망국의 한을 견디다 못해 1911.7.13 자결 (自決) 순국 (殉國) 한 분으로 의장 (義將) 으로서 겨레의 의사 (義士) 로서 독립운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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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
- 교전(交戰) : 서로 병력을 가지고 전쟁을 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이다.
본은 전주이며 일찍이 대과급제(大科及第)하여 벼슬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침략적 야욕에 대처하기 위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전개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스승 면암의 뒤를 따랐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늑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다.
그후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지시를 받고, 항일구국운동을 중국에까지 확대시키고자 원세개(袁世凱)를 통하여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고종이 퇴위하자 중국에 비밀히 들어가 중국의 관헌들과 교유하면서 일제를 한반도로부터 몰아낼 일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1911년 7월 13일 목을 매고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145∼14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3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1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7면